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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저널 고재열 기자와의 인터뷰 ( 2003.8)
Q: 본격적으로 음악 얘기를 해보자. 가장 애착이 가는 음반은 무엇인가? 평론가나 팬들은 주로 1,3,4,7,10,13,14집을 좋은 음반으로 꼽고 있다.
A:대강 비슷하다. 10집은 빼고 12집을 넣어 달라. 특히 13집과 14집을 좋아한다. 그런데 일반 대중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 같다. 가수들은 막 히트할 때보다 인기가 떨어진 뒤에 만든 음반에 더 신경을 쓰는 법이다.
Q: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어느 곡인가? <자존심> <나의 노래> <꿈> <킬리만자로의 표범> 정도라고 들었다.
A: <자존심>은 아니다. 나머지는 맞다. 만족하게 표현해내지는 못했지만 내 마음의 일면을 드러낸 노래들이다. <그 겨울의 찻집>은 가사가 가장 맘에 드는 곡이다.
Q: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싫어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가?
A:이 노래 때문에 유명해졌는데 왜 싫어하겠나? 활동을 하지 않을 때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극복하기 위해서 일부러 안 부른 적은 있다.
Q: 본인이 어떤 장르의 가수라고 생각하는가? 자작곡은 록이 많았던 것 같다.
A: 그런 것 같기는 한데,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작곡한 곡 중에서는 빠른 곡이 느린 곡보다 나은 편이다. 어렸을 때 빠른 록 음악을 주로 들어서인 것 같다. 느린 곡은 만드는 데 힘이 든다. 그렇다고 나를 록 가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대부분의 노래는 내 나름으로 재해석해서 만든 곡들이다. 조용필의 음악은 그냥 조용필의 음악일 뿐이다.
Q: 대중성과 작품성을 놓고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 어떻게 조화시켰나?
A: 지구레코드에 속했던 시절, 2년에 한 번은 내 음악을 싣고 그 중간에 내는 음반은 레코드사에 맡겼다. 내키지 않았지만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레코드사가 맡았던 음반은 다소 음악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나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한창 인기가 있을 때 그때그때 유행에 맞춰 불렀던 노래만으로 평가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Q: 197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자신의 음악적 스타일이 어떻게 달라졌다고 보는가?
A: 1970년대, 무명 밴드 시기에 참 연습을 많이 했다. 그때의 노력이 1980년대를 지탱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 같다. 1980년대는 전성기로 가장 바빴던 시기였다. 그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팝과 가요의 비율을 역전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데 만족한다. 1990년대는 내 음악이 방송에서 공연 무대로 옮아가는 시기였다. 여러 가지 다양한 무대를 시도했다. 2000년대는 무대 위로 음악이 완벽하게 옮아간 시기이다. 음악적으로도 정말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있다.
Q: 곧 발매될 18집 앨범에는 어떤 노래를 실을 예정인가?
A: 내 음악은 항상 다양했다. 이번 앨범의 노래들도 다양하다. 내가 만든 곡도 있고 다른 사람 곡을 받은 것도 있다. 기념비적인 앨범은 아니고 그냥 내가 하고 싶었던 음악을 했다. 대중성은 조금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 평론가 임진모와의 대담( 2003.8)
Q: 이번 무대세트에 얼마나 들어갑니까?
A: “구체적 액수는 밝힐 수 없지만 스폰서에게 받은 개런티를 거의 세트 꾸미는데 투입한다고 보면 돼요. 남 보기에는 수십억 쓰는 것 같다고 하지만 우린 오랫동안 구축된 '팀'이 있어요. 무대디자인, 조명, 음향, 장비 등등 오랜 경험으로 경비절감의 효과를 거둡니다.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굉장히 많은 돈이 들겠지요. 생각보다는 엄청난 예산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공연의 입장료만 20억원 상당이고 조용필씨가 많은 이익을 겨냥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투입 자본이 대략 입장료에 가까운 돈임을 가늠할 수 있다)”
Q: 학생들에게는 500명에 한해서 특별 할인을 실시하는데요, 학생층에게 혜택을 주는 이유는 뭔가요?
A: “제 공연이 조금 비싼 편이잖아요. 그동안 학생들이 쉽게 볼 수가 없었던 게 사실이죠. 그래서 신세대들이 많이 참여하는 공연이 되도록 하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또 학생들에게 '이런 공연은 봐야 한다. 이제 우리나라도 이 정도 공연을 할 수 있다. 외국 팝가수만 큰 공연하느냐'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이 참에 공연문화를 이슈로 만들고자 하는 생각이 작용했습니다.”
Q: 신보는 어떤 스타일의 음악인가요?
A: “(가녹음된 2곡을 들려주며) 어떤 스타일인지 알겠지요? 록에 오페라를 가미한 형태로 '가요이지만 비가요적인' 느낌이라고 할까. 듣기에 무리가 없겠지만 굉장히 웅장한 편곡이 될 겁니다. 공연도 그렇지만 음반 역시 제가 할 일은 새로운 지평의 개척 아닐까요? 우리 음악은 천편일률적이고 관습적 패턴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지요. 한번 기대해주십시오.”
Q: 조용필씨는 록 밴드 출신이라 과거부터 팝 앨범도 많이 청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장한 앨범은 얼마나 되며 현재 주로 듣는 팝가수는 누구인지 말씀해주시지요.
A: “앨범은 전에 LP를 많이 모았는데 다 없어지고 지금은 CD 좀 있는 편이죠. 초창기에는 비틀스, 벤처스, 마빈 게이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영미 록 앨범을 들었지요. 지금은 핑크 플로이드, AC/DC, 폴리스와 스팅, 퀸 등을 다시 듣고 있는데, 전 관심을 가지면 한 아티스트의 전곡, 전CD를 다 구입해서 청취하는 스타일이에요. 메탈리카도 이번 새 앨범을 포함해서 다 구해 들었어요. '연구대상'으로 판단되면 다 들어보는 거죠. 참, 근래는 뮤지컬 앨범에도 관심이 많아요.”
Q: 만약 '조용필 뮤지컬'이 만들어지면 흥미롭겠는데요. 아바 음악을 토대로 한 뮤지컬 [맘마미아]에는 아바 곡 32곡이 들어갔는데 조용필 히트 레퍼토리는 어림잡아도 50곡에 달하니까 뮤지컬 구성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A:“그렇잖아도 5년을 목표로 이런 저런 구상 중이에요. 스토리 대본이 완벽하다면 도전하고자 합니다. [맘마미아]는 런던에서 상연 첫날 봤죠. 뮤지컬은 제 음악작업의 최종목표 가운데 하나입니다.”
*** 오마이뉴스중에서( 2003. 8)
이어 그는 "18집이 기존의 음반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며 "위험성이 있어도 이는 또 다른 도전이라 생각했다"고 전했다. "아직 가수의 의미로는 30%밖에 오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그는 "앞으로 재능 있는 후배들을 뒤에서 도와 자신보다 더 훌륭한 아티스트를 만들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끝으로 그는 "이제부터는 보답하고 되돌려주는 마음으로 음악을 하겠다"며 "남은 음악 인생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중요할것 같다"라고 말했다.
*** 한겨레 / 신현준과의 대담 ( 2003.7)
신: 초창기 음반에는 록보다는 소울의 성향이 강해 보인다.
조: 당시 미군 무대에 서면 백인과 흑인, 라틴계는 물론 소수민족까지 신청곡이 아주 다양했다. 소울은 물론이고 모든 장르를 다 연주할 줄 알아야 했다. 제일 신나는 음악은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였다. 비틀스의 ‘아이 원트 투 홀드 유어 핸드’, 롤링 스톤스의 ‘새티스팩션’ 정도는 기본으로 연주해야 했다.
신: 1980년대 지구레코드 전속 시절의 녹음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들려 달라.
조: 당시 작곡가들이 ‘내 곡을 조용필이 부르게 해 달라’고 지구레코드 쪽에 부탁을 많이 했다. 선배들이었기 때문에 부탁을 모두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시간적인 이유로 모든 앨범에 총력을 기울이지는 못했다. 하나의 앨범을 내 뜻대로 하면 다음 앨범은 회사 쪽에 맡겨 버리는 식이었다.
신: 다음달 나오는 18집의 음악들을 소개해달라.
조: 요 몇년 뮤지컬에 신경을 많이 썼다. 직접 연출은 하지 않지만 무대 연출에 관심이 많아 여기저기 구경 다니고 디브이디도 많이 봤다. 새 앨범에서는 느린 곡은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했는데, 발라드이면서 클래식에 가까운 곡이 될 것 같다. 빠른 곡은 중간중간에 오페라가 들어가는 록 오페라 스타일이다. 김희갑 양인자 커플의 곡도 2개가 들어간다. 5년쯤 뒤에는 내 노래만 가지고 스토리를 만들어 오페라로 꾸미고 싶다.
신: 신중현은 록 음악의 외길을 걸은 데 반해 조용필씨는 록, 트로트, 발라드, 민요 등 음악적으로 다양한 길을 걸었다.
조: 신중현씨는 연주인이자 작곡가의 인생을 살았다. 나는 연주자이자 가수의 길을 갔기 때문에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가수는 엔터테이너로서 어떤 곡이라도 불러야 한다. 민요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언젠가는 내 장르를 결정해 들어갈 것이다.
****한국일보( 97.4)
조용필이 뽑은 자신의 대표곡 5
1.돌아와요 부산항에(1975년)
가수의 길을 열어준 사실상의 데뷔곡. 나 자
신도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인기의 요인은 참신함이 아닌가 싶다. 트로트
였던 원곡을 다소 빠른 [고고 템포]로 했고 목소리를 뒤집는 전형적인
트로트 창법을 배제하고 깨끗하게 불렀기 때문. 바이올린을 썼던 것도 당
시의 트로트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이곡은 대학가에서 먼저 히트했고
이후 [오동잎] 등 비슷한 템포의 노래들에 영향을 주었다.
2.창밖의 여자(80)
대마초 사건 이후 재기의 발판이 되었던 노래. 절치부심
했던 시기여서인지 남달리 정이 간다. 동아방송 라디오 연속극의 주제가로
본격적인 스타덤에 오르도록 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 곡에 쏟아졌던 사
람들의 열광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드라마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돌아
와요 부산항에]와 마찬가지로 코드, 리듬, 드럼 패턴 등을 기존의 가요와
다르게 편곡했던 점이 인기의 비결이었던 것 같다.
3.킬리만자로의 표범(86)
[허공]과 함께 발표되었던 곡. 읖조리듯 늘어놓
는 창법과 한편의 시와도 같은 노랫말로 인기를 모았다. 인간의 고독을 주
제로 한 노랫말이 내 노래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아나운서
한선교를 비롯해 주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애창곡이라는 얘기를 자주 듣
는다. 누가 들어도 꼭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내가 직접 쓴 가사는 아니지만 노래에 있어서 가사의 영향을 절감할 수 있
었던 곡.
4.모나리자(88)
음반보다는 공연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이 무렵부터 방
송을 지양하고 공연 위주의 활동으로 전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 기억하기 쉬운 제목과 경쾌한 리듬, 빠른 템포가 객석의 청중을 들
뜨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계산한 곡. 그 때문인지 발표 직후에는 같은 음
반의 타이틀 곡이었던 [서울 서울 서울]에 밀렸으나 최근 몇년전부터 콘
서트 때마다 빠지지 않고 앵콜 요청을 받는다.
5.꿈(91)
꿈을 주제로 한 동명의 음반 타이틀. 30년 가까운 가수 경력 중
드물게 하나의 주제 하에 만든 컨셉트 음반이었던 만큼 여느 음반 보다 공
을 많이 들였고 그래서 애착도 간다. 마흔줄에 접어들어 만든 탓인지 허무
함이 배어나오는 노랫말이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 그러나 특히 곡의 분위
기상 의도적으로 시도했던 탁성이 일부 나이 든 팬들로부터 [목소리가 갔
다]는 엉뚱한 평가를 받아 곤욕을 치르기도 했던 곡.
*** 강헌과의 대담중에서( 97.7)
조용필 : 나는 록이 좋아서 목소리를 바꾼 사람이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60년대말의 내 목소리는 단순한 미성에 불과했다. 오늘 위대한 탄생과 연습하는데 록의 탁성이 잘 나와서 기분이 좋다. 내년이면 30년, 이제 록을 제대로 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든다. 아닌게 아니라 내 주변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트로트로 가야 한다고 조언했고 개중에는 신경질까지 내는 이도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가고 싶지 않았다. 내년, 98년이면 30년인데, 내가 트로트로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30주년을 눈앞에 두고 나는 정면 승부를 택했다. 2,30대 감각의 여러 장르에다 그동안 많이 써두었던 4,50대 취향의 두곡 〈애상〉과 〈일몰〉을 선택했다. 이 두 곡은 성인 취향이 꼭 트로트가 아니라는 것과 트로트라고 해서 모든 것이 뽕짝은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조용필 : 벤처스와 비틀스에 매료되어서 음악을 시작했지만 미8군을 전전하면서 많은 음악을 접했다. 주크박스에선 흑인 음악이 많이 나왔는데 슈프림스나 제임스 브라운, 윌슨 피켓 같은 소울과 리듬앤블루스를 만날 수 있었고 당시 미국 백인 음악을 대표했던 몽키스와 C.C.R.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후로도 많은 이들의 노래를 불렀다. 스티비 원더, 로드 스튜어드, 에어로 스미스, 비지스 등등등이 다양한 사람들의 창법을 흉내내면서 내 것으로 포섭했다. 그런 가운데 한국사람으로서의 정서가 서서히 완성되지않았나 생각한다. 우리의 전통음악은 훨씬 뒤 내가 활동을 금지당했던 시절에 만났다. 깊이 있게 공부한 것은 아니고 고작해야 홍보전의 구걸하는 장면 정도인데, 악보로 옮기며 공부하다가 그 창법의 고-중-저 바이브레이션에 깜짝 놀랐다. 보컬을 본능적으로 타고났다는 흑인 음악도 대개 선율위에서 바이브레이션을 하는 것에 불과한데 우리의 판소리는 팝 음악하고는 갈래가 다른 리듬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뒤흔들어버리지 않는가? 여기서 배운 창법과 꽹과리의 리듬감을 실현해 본 노래가 82년 4집에 수록된 〈자존심〉이다.
'당신은 저~~~~'하고 떠는 국악적인 프레이즈에 펑키한 서구적 후렴부인 '이 마음은 사랑일까 착각일까?' 결합시켜 본 것이다.
조용필 : 대마초 파동이 없었더라면 80년대의 나는 없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정말이지 애증이 교차하는 노래이다. 그땐 이 노래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어디 공연가면 전부 외국 노래만 불렀다. 하지만 이 노래는 내 운명을 바꾸어 버린 노래가 아닌가? 3년이 지나 박대통령이 죽고 다시 컴백했을 때 그때서야 이 노래가 좋아졌다. 왜? 미우나 고우나 내 데뷔곡이니까.
이 노래와 일본의 대동아공영을 연결시키는 발상은 한마디로 매스컴이 작위적으로 몰아간 왜곡된 의견이다. 정작 일본에 가봐도 대중들은 국가와 이념을 두고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노래는 재일동포 모국 방문단이 오기 훨씬 전에 킹박의 동생인 박성철과 그림자의 멤버들이 새벽 다방을 돌면서 판을 돌렸고, 일반 대중들에게 퍼지기 전에 대학가와 다운타운의 음악다방 및 고고장에서 이미 유명해진 곡이다. 부산에서부터 대중적인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도 부산에 3일 초청공연 간 김에 50여 군데에 음반을 돌리면서부터이고, 일본에서 또한 몇 년에 걸쳐 언더그라운드에서 알려지다 음반이 발표되었다. 일본에서 이 노래가 먹힌 이유는 2/4박자의 전형적인 뽕작이 아닌 4/4박자의 고고 리듬에 있다고 본다.
이미 그때 일본에서도 2/4의 엔카는 구식이라고 별로 팔리지 않기 시작할 때였다.
강 헌 : 그리고 그해 가을 '미국 카네기 홀 공연 기념'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두번째 앨범이 발표되었고 전작의 여세를 몰아 이 앨범 또한 성공행진을 이어가지만 어딘가 모르게 졸속의 냄새가 짙었다. 그러나 이듬해 나온 세 번째 앨범은 그야말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사자후와 같은 앨범으로 조용필 1인제국의 결정적인 방점을 찍은 앨범이다. 이 앨범은 동요 (〈오빠생각〉)와 민요(〈강원도 아리랑〉)를 아우르는 한편으로 〈미워 미워 미워〉(정풍송 작곡)와 당신이 작곡한 〈일편단심 민들레야〉같은 트로트 넘버가 전반부에 포진하고 〈여와 남〉과 〈고추잠자리〉같은 '조용필 류'라고 불러 마땅한 록 넘버를 후반부에 배치하여 갈라지는 모든 세대의 기호를 통합하려는 야심으로 불타는 앨범이다. 하지만 트로트 레퍼토리는 아무래도 어른 구매자를 겨냥한 음반사의 압력 때문이 아닌가? 트로트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듣고 싶다. 하지만 밴드의 연주와 테이프 이펙트를 효과적으로 사용한 〈고추잠자리〉는 특정 세대의 취향을 뛰어넘어 모든 세대에게 다가가 80년대 최초의 록 넘버가 아닐까 한다. 하나의 앨범안에 트로트와 동행하던 이 시점 당신이 주장하고 싶었던 당신의 록의 슬로건은?
조용필 : 모든 것이 갑자기 바빠졌다. 진정한 의미의 2집 앨범은 내지 못했다고 보는 게 옳다. 지금도 뭘 녹음했는지 생각이 안 날 정도이다. 80년 10월 이희우 선생이 쓴 드라마의 주제가〈축복〉(〈촛불〉)을 불렀는데 이게 또 히트했고 그 곡을 중심으로 부랴부랴 음반이 나왔다. 3집의 〈일편단심 민들레야〉는 이산가족 찾기가 시작되었을 때 동아일보 기자였던 남편과 헤어진 어떤 할머니가 트로트로 만들어달라고 가사를 보내와 만든 곡으로 내가 처음 만든 트로트 곡이기도 하다. 음반사의 보이지 않는 압력?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부르다 보니까 그리고 나이가 들다 보니까 누가 뭐라고 하든 트로트에 우리 정서가 담겨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록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나하고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다 하더라도.
〈고추잠자리〉가 모든 세대에 다 먹히지는 않았다. 〈고추잠자리〉를 만들때 나는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을 만큼 겪은 서른 한 살이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가장 평온했을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수수깡 꺾고 굴렁쇠 굴리고 고추잠자리를 보았을 때가 아니었는지? 따라서 내가 엄마를 부르고 고추잠자리를 부르는 것은 하나의 절규였다. 내가 노래하겠다고 하자 호적에서 지워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우리 집안이나 독재로 얼룩졌던 우리 사회나 얼마나 보수적인가? 엄마와 고추잠자리를 찾았을 때 나는 나의 자유를 만끽했고, 그 힘이 4집의 〈못찾겠다 꾀꼬리〉로 이어졌다. 분노가 자신감으로 확장되었다고 할까? 이 노래는 집을 뛰쳐나와야 했던 내 마음을 그대로 밀어버린 곡이다. '등꾸따가 등꾸따가'로 나가는 흥분의 리듬을 먼저 설정했고, 첫 대목의 버컬에서 느낄 수 있듯이 아주 건방지게 불렀는데 그것은 나는 당돌하게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같았다.
조용필 : 4집의 음악적 목표는 그룹의 음악이다. 나는 위대한 탄생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스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에 록 밴드가 얼마나 나왔나? 나는 희망을 만들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 다른 밴드와 비교되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다. 다른 밴드와 차이가 심할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노력했는데......80년대가 시작되었을 때, 다시 말해 통금이 해제되고 컬러TV시대가 개막되었을 때 10대의 갈구는 무한하게 늘어났지만 이 땅의 음악은 다양하지 않았다. 나는 비디오적인 요소는 거의 없는, 10대의 아이돌스타가 될 만한 현대적인 카리스마와 스타로서의 끼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라는 음악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리듬을 열어놓았고 하나의 노래속에 드라마를 불어 넣었다. 이것은 결코 내 개인의 성과가 아니다. 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언더그라운드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제 넓어지는구나, 자유로워지는구나, 선택의 폭이 불어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무척 기뻤다. 나도 바로 그 언더그라운드 출신이므로. 오버그라운드와 언더그라운드의 조화로운 발전, 그것이야말로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바람직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조용필 : 나는 80년대에 컴백에 성공한 뒤에도 공연에 온 신경을 쏟았다. 몇 사람이 연합해서 벌이는 리사이틀 문화에서 단독으로 펼치는 콘서트 문화의 기틀을 닦는데 기여한 것을 5년 연속 방송사의 가수왕 타이틀을 딴 것보다 더욱 소중하게 생각한다. 공연의 기억은 끝이 없다. 그중에서도 나의 고향이나 진배없는 부산의 해운대에서 81년부터 93년까지 세 차례 열렸던 백사장의 콘서트, 그리고 일본 부도캉 체육관에서의 솔로 콘서트, 그리고 최근 고려대에서 열렸던 '자유'콘서트 등등. 86년에서 87년 1년간 148회의 공연을 강행하기도 했다.
콘서트는 연주는 말할 것도 없고 음향과 조명의 노하우가 결합된 종합예술이다. 나는 기자재와 스태프 가릴 것 없이 공연에 모든 것을 투자해왔다. 나는 위대한 탄생의 공연이 여느 콘서트와 다른 것은 이 오랜 노력의 결과라고 자부한다. 코엑스의 대서양 홀에서 할 때도 사방에서 울리는 소리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다 스피커를 아예 바닥으로 주욱 깔아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하울링을 맞받아쳐서 잡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콘서트는 진흥기금이다 뭐다 해서 거의 다 뺏기니까 잘해야 본전이다. 설상가상으로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 우리 대중들은 음악을 좋아하지만 직접 체험의 비중이 너무 낮다 보니 콘서트에 임하는 의식도 어쩔 수 없이 부족하다. 중앙이 이러니 지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아예 공간 자체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연전에 포항시의 초청을 받아 포철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할 때다. 워낙 보수적인 분위기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스타디움을 채운 어른들이 공연의 반이 끝나갈 때까지 미동도 않는데다 시선은 무대가 아니라 무대 앞 왼쪽의, 10대 20대들이 일어서서 열광하는 쪽만 향하고 있었다. 이런 풍경 속에선 같이 호흡하는 공연문화가 만들어질리 만무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난 6월의 자유 공연은 무대와 객석이 한 호흡으로 어우러진, 오랜만의 신선한 경험이었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낌없는 젊음의 힘만이 공연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다. 내쳐 말하자면 한 나라를 운영하는 관리들이 문화를 등지고 살게끔 만든다. 이어령씨가 문화부 장관을 할 때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기도 했지만 장관 한 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재벌쪽은? 눈앞의 돈 벌려고 음반 사업에 뛰어들지 말고 그 돈 좀 제대로 된 문화사업에 투자하면 안 되나
<황진이〉는 드라마 주제가인데 , 판소리적인 멜로디라인을 응용하여 강렬한 리듬을 만들고 거기에 소울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나는 톤을 중요시한다. 정신차릴 틈 없는 스케줄 속에서도 밤에 혼자 스튜디오에 앉아 이펙트들을 연구했다. 사운드에 대한 나의 철학은 리듬을 바탕으로 쌓인 각 악기 파트의 연주와 멜로디가 하나의 메세지로 종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조건 더빙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톤을 많이 알아야 하는 건 그래야만 이 모든 과정에서 끝없는 아이디어를 구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이틀 곡을 뒤로 미루고 〈산유화〉와 〈한강〉, 그리고 뒷면의 〈황진이〉등을 앞으로 내세운 건 앞면 톱에 타이틀 곡을 놓아야 하는 관습 자체가 싫었기 때문이다.
조용필 : 노래는 그 시대의 역사와 추억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로 우리의 노래는 애인과 고향을 꼽아 왔다. 그런데 왜 친구에 대한 노래는 거의 없는가? 그것은 아마도 식민지, 분단, 전쟁으로 이어진 역사가 옆을 돌아볼 틈이 없게 만든 것은 아닐까? 나는 위대한 탄새의 건반주자 이호준과 '친구'라는 화두를 놓고 씨름했다. 슬프고 애상적인 것도 아니고 〈잘살아보세〉류의 건전가요도 아니면서 어떤 정신적인 힘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것... 이 노래는 장르의 문법이 없다. 그러나 이 노래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처음부터 확신이 섰다. 즉 이 노래는 '친구'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수용자의 나이와 스타일을 초월할 수 있는 노래가 될 수 있으리라는 판단말이다. 실제로 이 노래는 공식석상에서도 창피해하지 않고 많이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이런 계열의 노래가 9집의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와 13집의 〈꿈〉이다. 쑥스러운 말이지만 내가 만든 노래중의 명곡이라고 생각한다.
강 헌 : 하지만 84년의 6집은 완성도에 있어서 산만할 뿐만 아니라 〈정의 마음〉을 제외한 거개의 노래가 다른 작곡가로부터 받아 채움으로써 당신과 위대한 탄생의 아이덴티티를 거의 포기하다시피한 앨범이 아닌가?
조용필 : 그렇다. 2집이 그러했듯이 6집 역시 살인적인 스케줄과 1년에 앨범 하나이상을 내어야 하는 음반사의 관행에 시간이 버텨내지 못 했다. 그것은 85년 상반기 7집의 폭발 이후 연이어 하반기에 나온 8집도 마찬가지이다. 이러다간 자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압박감 아래서 다른 사람의 곡으로 6집을 만들 때 이미 7집의 곡을 쓰고 있었고 , 하나에 집중하고 하나를 건너뛰는 징검다리 배팅이랄까 , 비즈니스의 룰 속에서 나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강 헌 : 7집으로 당신은 명실상부한 제왕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이 앨범은 풍부하고 성숙한 감정이입이 실현된 발라드 〈눈물로 보이는 그대〉로 시작하지만 로큰롤의 열기가 앨범 전반을 관통한다. 한마디로 폭발적으로 질주하는 조용필 록의 비등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30대 중반에 다다른 당신에게 로큰롤은 어떤 것이었는가?
조용필 : 미국에서는 두번째 박자에 턱이 앞으로 나오면 히트한다는 속설이 있다.
이 느낌이 모든 록의 기본이다.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 80년대 초중반 나의 음악에 열광하던 이 땅의 10대들은 록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 세대에게 록의 대중적인 모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죽을 때 나의 음악은 이것이다라는 바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나의 음악이 그저 흘러가는 소모품이 되고 싶지는 않다. 〈창밖의 여자〉와〈비련〉같은 발라드까지 강렬한 파워를 내뿜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노래의 근원에 록의 에너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록이 좋다, 젊음이 좋다, 이 시대를 음악으로 얘기하고 싶다. 그것의 불만, 흥미, 거짓, 사랑을 얘기하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이 시대의 가장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제, 오늘 그리고〉와〈미지의 세계〉, 〈여행을 떠나요〉같은 노래를 만들 때 나는 더 이상 젊지는 않았지만 난 젊음의 대변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폭력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그러나 그 분노만 얘기해서는 안 된다. 폭력 그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서태지나 신해철, 강산에 같은 90년대의 젊은 아티스트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대범함과 자유분방한 표현력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좀 건방지게 말한다면 90년대의 음악이 획기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템포 120의 강렬한 로큰롤만이 아니라 이제는 한국의 젊은 힘을 통일시킬 장르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세가 원망할 것이다. 언제나 시작이 반인 법이다.
조용필 : 8집은 한마디로 성인세대에 대한 서비스다. 이 세대의 호응은 좋았지만 밑 세대가 많이 떨어져 나갔음을 당시의 콘서트 때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삶에 대한 확신을 노래한 것이다. 확신이 없는 삶은 무가치하다. 운동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투쟁은 외로운 것이다. 하려면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한때 투쟁했다 그만두면 안 한 것보다 못하다. 그래서 나는 한번도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아마도 동연배가 아닐까 하는데, 김민기가 대단하고 멋있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음악으로 투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87년, 9집을 발표할 때 나는 개인적인 불행과 맞물려 정신적으로 방황을 거듭했다. 쉬어야 되는 거 아닌가? 나란 인간은 뭐냐? 회의가 회의를 물고 맴돌았다. 그런 가운데 〈청춘시대〉의 기타 솔로가 잉베이 맘스틴의 표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타를 맡았던 당시의 멤버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그 노래의 홍보를 그만 두었다. 가장 힘든 시기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양인자, 김희갑 두분의 인연이 맺어지는 데 기여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음악 생활 20주년을 기념하는 10집의 파트Ⅱ 앨범은 그 콤비에게 맡기고 싶었고, 그 나머지 시간을 90년대를 맞이할 준비에 착수했다. 91년의 〈꿈〉도 이미 그때 만들어놓은 작품이다.〈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은 70년대에 블라인드 페이스의 〈Do What You Like〉를 했던 기억을 상기하며 희갑이 형과 음악 드라마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한 결과물이다.
조용필 : 90... 무엇보다도 80년대의 옷을 벗어야 했다. 하물며 톤까지도. 12집 〈추억속의 재회〉부터 사운드가 강렬하고 무거워졌으며(특히 13집의 B면이 그렇다) 무엇보다 진지해졌다. 대중의 반응에 사로잡히지 않고 록을 바탕으로 서양의 클래식적인 요소, 중국의 민속 악기(14집〈이별의 인사〉에서 쓴 二湖), 라틴 계열의 퓨젼 리듬을 다양하게 접목해 본 것이다. 80년대엔 사실 탁성도 그리 많이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음반사로부터 독립도 했으니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더 가득 찬 소리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기의 분위기는 14집 홍보를 할 때 피부로 느꼈다. 〈슬픈 베아트리체〉에 이어 〈고독한 러너〉를 내보냈는데 92년 가을의 모든 채널은 랩 댄스뮤직으로 몰려갔고 그 노래는 제목처럼 더이상 힘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위대한 탄생에게 거개의 트랙을 맡겨본 후속 앨범 15집까지 최악의 실패를 기록했다고 해서 나는 슬퍼하거나 노할 까닭이 없었다. 역사는 지나고 나서야 역사다.
조용필 : 뮤지컬은 내 필생의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 가면 틈만 나면 뮤지컬을 보았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거미 여인의 키스〉는 돈을 주고 번역한 대
본을 보면서 아홉 번을 관람한 적도 있다. 내년 30주년 활동을 벌인 뒤 뮤지컬은 3년 정도의 시간을 집중해서 다시 도전할 것이다. 밀릴 때는 철저히 밀려야 한다. 이 말은 슬럼프 조차도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버티다간 앞으로 고꾸라진다. 아예 내 손으로 내 구덩이를 판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모든 폭풍이 지나고 난 뒤 그때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각오가 중요하다. 자신만만하게 쓰러져야만 자신감 있게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조용필 : 나는 기타만큼이나 키보드의 웅장하고 화려한 세계를 사랑한다. 그래서 그냥 달리는 심플한 록보다는 핑크 플로이드 같은 사운드 메시지가 충만한 록을 좋아한다. 톰 킨은 13집에서 신선한 경험을 안겨준 인물로, LA에서 내가 머물던 플로리다로 날라와 2박3일 간 피아노도 치고 기타도 치면서 준비해 간 6곡의 미팅을 마쳤다. 오케스트레이션이 필요한 나머지 곡을 맡은 제러미 러복은 영국 출신으로 아주 비싼 65세의 베테랑이다. 이번 16집의 핵심은 무리를 하지 않는 것, 가장 중용적인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었다. 승부를 내는 것은 내년의 30주년 17집이라고 보았고 , 따라서 히트를 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내년의 앨범에선 나는 16집과는 다른 전략의, 30년 전의 초심으로 달려간 음악을 선보일 것이다. 즉 내 나름대로 록을 정리할 것이며 슬로우곡 또한 그 기조에서 정리할 것이다.
진정한 록은 무엇인가?
나는 다시 이 질문에 도전하려고 한다. 록은 떠드는 것이냐, 얘기해야 하는 것이냐, 함께 나누는 것이냐?
나는 아직 모른다. 만들면서 느껴보고 싶다.
네이버 블러그 중에 ....
Q: 본격적으로 음악 얘기를 해보자. 가장 애착이 가는 음반은 무엇인가? 평론가나 팬들은 주로 1,3,4,7,10,13,14집을 좋은 음반으로 꼽고 있다.
A:대강 비슷하다. 10집은 빼고 12집을 넣어 달라. 특히 13집과 14집을 좋아한다. 그런데 일반 대중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 같다. 가수들은 막 히트할 때보다 인기가 떨어진 뒤에 만든 음반에 더 신경을 쓰는 법이다.
Q: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어느 곡인가? <자존심> <나의 노래> <꿈> <킬리만자로의 표범> 정도라고 들었다.
A: <자존심>은 아니다. 나머지는 맞다. 만족하게 표현해내지는 못했지만 내 마음의 일면을 드러낸 노래들이다. <그 겨울의 찻집>은 가사가 가장 맘에 드는 곡이다.
Q: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싫어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가?
A:이 노래 때문에 유명해졌는데 왜 싫어하겠나? 활동을 하지 않을 때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극복하기 위해서 일부러 안 부른 적은 있다.
Q: 본인이 어떤 장르의 가수라고 생각하는가? 자작곡은 록이 많았던 것 같다.
A: 그런 것 같기는 한데,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작곡한 곡 중에서는 빠른 곡이 느린 곡보다 나은 편이다. 어렸을 때 빠른 록 음악을 주로 들어서인 것 같다. 느린 곡은 만드는 데 힘이 든다. 그렇다고 나를 록 가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대부분의 노래는 내 나름으로 재해석해서 만든 곡들이다. 조용필의 음악은 그냥 조용필의 음악일 뿐이다.
Q: 대중성과 작품성을 놓고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 어떻게 조화시켰나?
A: 지구레코드에 속했던 시절, 2년에 한 번은 내 음악을 싣고 그 중간에 내는 음반은 레코드사에 맡겼다. 내키지 않았지만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레코드사가 맡았던 음반은 다소 음악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나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한창 인기가 있을 때 그때그때 유행에 맞춰 불렀던 노래만으로 평가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Q: 197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자신의 음악적 스타일이 어떻게 달라졌다고 보는가?
A: 1970년대, 무명 밴드 시기에 참 연습을 많이 했다. 그때의 노력이 1980년대를 지탱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 같다. 1980년대는 전성기로 가장 바빴던 시기였다. 그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팝과 가요의 비율을 역전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데 만족한다. 1990년대는 내 음악이 방송에서 공연 무대로 옮아가는 시기였다. 여러 가지 다양한 무대를 시도했다. 2000년대는 무대 위로 음악이 완벽하게 옮아간 시기이다. 음악적으로도 정말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있다.
Q: 곧 발매될 18집 앨범에는 어떤 노래를 실을 예정인가?
A: 내 음악은 항상 다양했다. 이번 앨범의 노래들도 다양하다. 내가 만든 곡도 있고 다른 사람 곡을 받은 것도 있다. 기념비적인 앨범은 아니고 그냥 내가 하고 싶었던 음악을 했다. 대중성은 조금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 평론가 임진모와의 대담( 2003.8)
Q: 이번 무대세트에 얼마나 들어갑니까?
A: “구체적 액수는 밝힐 수 없지만 스폰서에게 받은 개런티를 거의 세트 꾸미는데 투입한다고 보면 돼요. 남 보기에는 수십억 쓰는 것 같다고 하지만 우린 오랫동안 구축된 '팀'이 있어요. 무대디자인, 조명, 음향, 장비 등등 오랜 경험으로 경비절감의 효과를 거둡니다.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굉장히 많은 돈이 들겠지요. 생각보다는 엄청난 예산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공연의 입장료만 20억원 상당이고 조용필씨가 많은 이익을 겨냥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투입 자본이 대략 입장료에 가까운 돈임을 가늠할 수 있다)”
Q: 학생들에게는 500명에 한해서 특별 할인을 실시하는데요, 학생층에게 혜택을 주는 이유는 뭔가요?
A: “제 공연이 조금 비싼 편이잖아요. 그동안 학생들이 쉽게 볼 수가 없었던 게 사실이죠. 그래서 신세대들이 많이 참여하는 공연이 되도록 하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또 학생들에게 '이런 공연은 봐야 한다. 이제 우리나라도 이 정도 공연을 할 수 있다. 외국 팝가수만 큰 공연하느냐'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이 참에 공연문화를 이슈로 만들고자 하는 생각이 작용했습니다.”
Q: 신보는 어떤 스타일의 음악인가요?
A: “(가녹음된 2곡을 들려주며) 어떤 스타일인지 알겠지요? 록에 오페라를 가미한 형태로 '가요이지만 비가요적인' 느낌이라고 할까. 듣기에 무리가 없겠지만 굉장히 웅장한 편곡이 될 겁니다. 공연도 그렇지만 음반 역시 제가 할 일은 새로운 지평의 개척 아닐까요? 우리 음악은 천편일률적이고 관습적 패턴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지요. 한번 기대해주십시오.”
Q: 조용필씨는 록 밴드 출신이라 과거부터 팝 앨범도 많이 청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장한 앨범은 얼마나 되며 현재 주로 듣는 팝가수는 누구인지 말씀해주시지요.
A: “앨범은 전에 LP를 많이 모았는데 다 없어지고 지금은 CD 좀 있는 편이죠. 초창기에는 비틀스, 벤처스, 마빈 게이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영미 록 앨범을 들었지요. 지금은 핑크 플로이드, AC/DC, 폴리스와 스팅, 퀸 등을 다시 듣고 있는데, 전 관심을 가지면 한 아티스트의 전곡, 전CD를 다 구입해서 청취하는 스타일이에요. 메탈리카도 이번 새 앨범을 포함해서 다 구해 들었어요. '연구대상'으로 판단되면 다 들어보는 거죠. 참, 근래는 뮤지컬 앨범에도 관심이 많아요.”
Q: 만약 '조용필 뮤지컬'이 만들어지면 흥미롭겠는데요. 아바 음악을 토대로 한 뮤지컬 [맘마미아]에는 아바 곡 32곡이 들어갔는데 조용필 히트 레퍼토리는 어림잡아도 50곡에 달하니까 뮤지컬 구성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A:“그렇잖아도 5년을 목표로 이런 저런 구상 중이에요. 스토리 대본이 완벽하다면 도전하고자 합니다. [맘마미아]는 런던에서 상연 첫날 봤죠. 뮤지컬은 제 음악작업의 최종목표 가운데 하나입니다.”
*** 오마이뉴스중에서( 2003. 8)
이어 그는 "18집이 기존의 음반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며 "위험성이 있어도 이는 또 다른 도전이라 생각했다"고 전했다. "아직 가수의 의미로는 30%밖에 오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그는 "앞으로 재능 있는 후배들을 뒤에서 도와 자신보다 더 훌륭한 아티스트를 만들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끝으로 그는 "이제부터는 보답하고 되돌려주는 마음으로 음악을 하겠다"며 "남은 음악 인생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중요할것 같다"라고 말했다.
*** 한겨레 / 신현준과의 대담 ( 2003.7)
신: 초창기 음반에는 록보다는 소울의 성향이 강해 보인다.
조: 당시 미군 무대에 서면 백인과 흑인, 라틴계는 물론 소수민족까지 신청곡이 아주 다양했다. 소울은 물론이고 모든 장르를 다 연주할 줄 알아야 했다. 제일 신나는 음악은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였다. 비틀스의 ‘아이 원트 투 홀드 유어 핸드’, 롤링 스톤스의 ‘새티스팩션’ 정도는 기본으로 연주해야 했다.
신: 1980년대 지구레코드 전속 시절의 녹음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들려 달라.
조: 당시 작곡가들이 ‘내 곡을 조용필이 부르게 해 달라’고 지구레코드 쪽에 부탁을 많이 했다. 선배들이었기 때문에 부탁을 모두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시간적인 이유로 모든 앨범에 총력을 기울이지는 못했다. 하나의 앨범을 내 뜻대로 하면 다음 앨범은 회사 쪽에 맡겨 버리는 식이었다.
신: 다음달 나오는 18집의 음악들을 소개해달라.
조: 요 몇년 뮤지컬에 신경을 많이 썼다. 직접 연출은 하지 않지만 무대 연출에 관심이 많아 여기저기 구경 다니고 디브이디도 많이 봤다. 새 앨범에서는 느린 곡은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했는데, 발라드이면서 클래식에 가까운 곡이 될 것 같다. 빠른 곡은 중간중간에 오페라가 들어가는 록 오페라 스타일이다. 김희갑 양인자 커플의 곡도 2개가 들어간다. 5년쯤 뒤에는 내 노래만 가지고 스토리를 만들어 오페라로 꾸미고 싶다.
신: 신중현은 록 음악의 외길을 걸은 데 반해 조용필씨는 록, 트로트, 발라드, 민요 등 음악적으로 다양한 길을 걸었다.
조: 신중현씨는 연주인이자 작곡가의 인생을 살았다. 나는 연주자이자 가수의 길을 갔기 때문에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가수는 엔터테이너로서 어떤 곡이라도 불러야 한다. 민요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언젠가는 내 장르를 결정해 들어갈 것이다.
****한국일보( 97.4)
조용필이 뽑은 자신의 대표곡 5
1.돌아와요 부산항에(1975년)
가수의 길을 열어준 사실상의 데뷔곡. 나 자
신도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인기의 요인은 참신함이 아닌가 싶다. 트로트
였던 원곡을 다소 빠른 [고고 템포]로 했고 목소리를 뒤집는 전형적인
트로트 창법을 배제하고 깨끗하게 불렀기 때문. 바이올린을 썼던 것도 당
시의 트로트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이곡은 대학가에서 먼저 히트했고
이후 [오동잎] 등 비슷한 템포의 노래들에 영향을 주었다.
2.창밖의 여자(80)
대마초 사건 이후 재기의 발판이 되었던 노래. 절치부심
했던 시기여서인지 남달리 정이 간다. 동아방송 라디오 연속극의 주제가로
본격적인 스타덤에 오르도록 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 곡에 쏟아졌던 사
람들의 열광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드라마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돌아
와요 부산항에]와 마찬가지로 코드, 리듬, 드럼 패턴 등을 기존의 가요와
다르게 편곡했던 점이 인기의 비결이었던 것 같다.
3.킬리만자로의 표범(86)
[허공]과 함께 발표되었던 곡. 읖조리듯 늘어놓
는 창법과 한편의 시와도 같은 노랫말로 인기를 모았다. 인간의 고독을 주
제로 한 노랫말이 내 노래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아나운서
한선교를 비롯해 주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애창곡이라는 얘기를 자주 듣
는다. 누가 들어도 꼭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내가 직접 쓴 가사는 아니지만 노래에 있어서 가사의 영향을 절감할 수 있
었던 곡.
4.모나리자(88)
음반보다는 공연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이 무렵부터 방
송을 지양하고 공연 위주의 활동으로 전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 기억하기 쉬운 제목과 경쾌한 리듬, 빠른 템포가 객석의 청중을 들
뜨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계산한 곡. 그 때문인지 발표 직후에는 같은 음
반의 타이틀 곡이었던 [서울 서울 서울]에 밀렸으나 최근 몇년전부터 콘
서트 때마다 빠지지 않고 앵콜 요청을 받는다.
5.꿈(91)
꿈을 주제로 한 동명의 음반 타이틀. 30년 가까운 가수 경력 중
드물게 하나의 주제 하에 만든 컨셉트 음반이었던 만큼 여느 음반 보다 공
을 많이 들였고 그래서 애착도 간다. 마흔줄에 접어들어 만든 탓인지 허무
함이 배어나오는 노랫말이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 그러나 특히 곡의 분위
기상 의도적으로 시도했던 탁성이 일부 나이 든 팬들로부터 [목소리가 갔
다]는 엉뚱한 평가를 받아 곤욕을 치르기도 했던 곡.
*** 강헌과의 대담중에서( 97.7)
조용필 : 나는 록이 좋아서 목소리를 바꾼 사람이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60년대말의 내 목소리는 단순한 미성에 불과했다. 오늘 위대한 탄생과 연습하는데 록의 탁성이 잘 나와서 기분이 좋다. 내년이면 30년, 이제 록을 제대로 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든다. 아닌게 아니라 내 주변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트로트로 가야 한다고 조언했고 개중에는 신경질까지 내는 이도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가고 싶지 않았다. 내년, 98년이면 30년인데, 내가 트로트로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30주년을 눈앞에 두고 나는 정면 승부를 택했다. 2,30대 감각의 여러 장르에다 그동안 많이 써두었던 4,50대 취향의 두곡 〈애상〉과 〈일몰〉을 선택했다. 이 두 곡은 성인 취향이 꼭 트로트가 아니라는 것과 트로트라고 해서 모든 것이 뽕짝은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조용필 : 벤처스와 비틀스에 매료되어서 음악을 시작했지만 미8군을 전전하면서 많은 음악을 접했다. 주크박스에선 흑인 음악이 많이 나왔는데 슈프림스나 제임스 브라운, 윌슨 피켓 같은 소울과 리듬앤블루스를 만날 수 있었고 당시 미국 백인 음악을 대표했던 몽키스와 C.C.R.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후로도 많은 이들의 노래를 불렀다. 스티비 원더, 로드 스튜어드, 에어로 스미스, 비지스 등등등이 다양한 사람들의 창법을 흉내내면서 내 것으로 포섭했다. 그런 가운데 한국사람으로서의 정서가 서서히 완성되지않았나 생각한다. 우리의 전통음악은 훨씬 뒤 내가 활동을 금지당했던 시절에 만났다. 깊이 있게 공부한 것은 아니고 고작해야 홍보전의 구걸하는 장면 정도인데, 악보로 옮기며 공부하다가 그 창법의 고-중-저 바이브레이션에 깜짝 놀랐다. 보컬을 본능적으로 타고났다는 흑인 음악도 대개 선율위에서 바이브레이션을 하는 것에 불과한데 우리의 판소리는 팝 음악하고는 갈래가 다른 리듬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뒤흔들어버리지 않는가? 여기서 배운 창법과 꽹과리의 리듬감을 실현해 본 노래가 82년 4집에 수록된 〈자존심〉이다.
'당신은 저~~~~'하고 떠는 국악적인 프레이즈에 펑키한 서구적 후렴부인 '이 마음은 사랑일까 착각일까?' 결합시켜 본 것이다.
조용필 : 대마초 파동이 없었더라면 80년대의 나는 없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정말이지 애증이 교차하는 노래이다. 그땐 이 노래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어디 공연가면 전부 외국 노래만 불렀다. 하지만 이 노래는 내 운명을 바꾸어 버린 노래가 아닌가? 3년이 지나 박대통령이 죽고 다시 컴백했을 때 그때서야 이 노래가 좋아졌다. 왜? 미우나 고우나 내 데뷔곡이니까.
이 노래와 일본의 대동아공영을 연결시키는 발상은 한마디로 매스컴이 작위적으로 몰아간 왜곡된 의견이다. 정작 일본에 가봐도 대중들은 국가와 이념을 두고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노래는 재일동포 모국 방문단이 오기 훨씬 전에 킹박의 동생인 박성철과 그림자의 멤버들이 새벽 다방을 돌면서 판을 돌렸고, 일반 대중들에게 퍼지기 전에 대학가와 다운타운의 음악다방 및 고고장에서 이미 유명해진 곡이다. 부산에서부터 대중적인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도 부산에 3일 초청공연 간 김에 50여 군데에 음반을 돌리면서부터이고, 일본에서 또한 몇 년에 걸쳐 언더그라운드에서 알려지다 음반이 발표되었다. 일본에서 이 노래가 먹힌 이유는 2/4박자의 전형적인 뽕작이 아닌 4/4박자의 고고 리듬에 있다고 본다.
이미 그때 일본에서도 2/4의 엔카는 구식이라고 별로 팔리지 않기 시작할 때였다.
강 헌 : 그리고 그해 가을 '미국 카네기 홀 공연 기념'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두번째 앨범이 발표되었고 전작의 여세를 몰아 이 앨범 또한 성공행진을 이어가지만 어딘가 모르게 졸속의 냄새가 짙었다. 그러나 이듬해 나온 세 번째 앨범은 그야말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사자후와 같은 앨범으로 조용필 1인제국의 결정적인 방점을 찍은 앨범이다. 이 앨범은 동요 (〈오빠생각〉)와 민요(〈강원도 아리랑〉)를 아우르는 한편으로 〈미워 미워 미워〉(정풍송 작곡)와 당신이 작곡한 〈일편단심 민들레야〉같은 트로트 넘버가 전반부에 포진하고 〈여와 남〉과 〈고추잠자리〉같은 '조용필 류'라고 불러 마땅한 록 넘버를 후반부에 배치하여 갈라지는 모든 세대의 기호를 통합하려는 야심으로 불타는 앨범이다. 하지만 트로트 레퍼토리는 아무래도 어른 구매자를 겨냥한 음반사의 압력 때문이 아닌가? 트로트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듣고 싶다. 하지만 밴드의 연주와 테이프 이펙트를 효과적으로 사용한 〈고추잠자리〉는 특정 세대의 취향을 뛰어넘어 모든 세대에게 다가가 80년대 최초의 록 넘버가 아닐까 한다. 하나의 앨범안에 트로트와 동행하던 이 시점 당신이 주장하고 싶었던 당신의 록의 슬로건은?
조용필 : 모든 것이 갑자기 바빠졌다. 진정한 의미의 2집 앨범은 내지 못했다고 보는 게 옳다. 지금도 뭘 녹음했는지 생각이 안 날 정도이다. 80년 10월 이희우 선생이 쓴 드라마의 주제가〈축복〉(〈촛불〉)을 불렀는데 이게 또 히트했고 그 곡을 중심으로 부랴부랴 음반이 나왔다. 3집의 〈일편단심 민들레야〉는 이산가족 찾기가 시작되었을 때 동아일보 기자였던 남편과 헤어진 어떤 할머니가 트로트로 만들어달라고 가사를 보내와 만든 곡으로 내가 처음 만든 트로트 곡이기도 하다. 음반사의 보이지 않는 압력?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부르다 보니까 그리고 나이가 들다 보니까 누가 뭐라고 하든 트로트에 우리 정서가 담겨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록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나하고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다 하더라도.
〈고추잠자리〉가 모든 세대에 다 먹히지는 않았다. 〈고추잠자리〉를 만들때 나는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을 만큼 겪은 서른 한 살이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가장 평온했을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수수깡 꺾고 굴렁쇠 굴리고 고추잠자리를 보았을 때가 아니었는지? 따라서 내가 엄마를 부르고 고추잠자리를 부르는 것은 하나의 절규였다. 내가 노래하겠다고 하자 호적에서 지워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우리 집안이나 독재로 얼룩졌던 우리 사회나 얼마나 보수적인가? 엄마와 고추잠자리를 찾았을 때 나는 나의 자유를 만끽했고, 그 힘이 4집의 〈못찾겠다 꾀꼬리〉로 이어졌다. 분노가 자신감으로 확장되었다고 할까? 이 노래는 집을 뛰쳐나와야 했던 내 마음을 그대로 밀어버린 곡이다. '등꾸따가 등꾸따가'로 나가는 흥분의 리듬을 먼저 설정했고, 첫 대목의 버컬에서 느낄 수 있듯이 아주 건방지게 불렀는데 그것은 나는 당돌하게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같았다.
조용필 : 4집의 음악적 목표는 그룹의 음악이다. 나는 위대한 탄생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스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에 록 밴드가 얼마나 나왔나? 나는 희망을 만들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 다른 밴드와 비교되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다. 다른 밴드와 차이가 심할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노력했는데......80년대가 시작되었을 때, 다시 말해 통금이 해제되고 컬러TV시대가 개막되었을 때 10대의 갈구는 무한하게 늘어났지만 이 땅의 음악은 다양하지 않았다. 나는 비디오적인 요소는 거의 없는, 10대의 아이돌스타가 될 만한 현대적인 카리스마와 스타로서의 끼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라는 음악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리듬을 열어놓았고 하나의 노래속에 드라마를 불어 넣었다. 이것은 결코 내 개인의 성과가 아니다. 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언더그라운드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제 넓어지는구나, 자유로워지는구나, 선택의 폭이 불어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무척 기뻤다. 나도 바로 그 언더그라운드 출신이므로. 오버그라운드와 언더그라운드의 조화로운 발전, 그것이야말로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바람직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조용필 : 나는 80년대에 컴백에 성공한 뒤에도 공연에 온 신경을 쏟았다. 몇 사람이 연합해서 벌이는 리사이틀 문화에서 단독으로 펼치는 콘서트 문화의 기틀을 닦는데 기여한 것을 5년 연속 방송사의 가수왕 타이틀을 딴 것보다 더욱 소중하게 생각한다. 공연의 기억은 끝이 없다. 그중에서도 나의 고향이나 진배없는 부산의 해운대에서 81년부터 93년까지 세 차례 열렸던 백사장의 콘서트, 그리고 일본 부도캉 체육관에서의 솔로 콘서트, 그리고 최근 고려대에서 열렸던 '자유'콘서트 등등. 86년에서 87년 1년간 148회의 공연을 강행하기도 했다.
콘서트는 연주는 말할 것도 없고 음향과 조명의 노하우가 결합된 종합예술이다. 나는 기자재와 스태프 가릴 것 없이 공연에 모든 것을 투자해왔다. 나는 위대한 탄생의 공연이 여느 콘서트와 다른 것은 이 오랜 노력의 결과라고 자부한다. 코엑스의 대서양 홀에서 할 때도 사방에서 울리는 소리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다 스피커를 아예 바닥으로 주욱 깔아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하울링을 맞받아쳐서 잡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콘서트는 진흥기금이다 뭐다 해서 거의 다 뺏기니까 잘해야 본전이다. 설상가상으로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 우리 대중들은 음악을 좋아하지만 직접 체험의 비중이 너무 낮다 보니 콘서트에 임하는 의식도 어쩔 수 없이 부족하다. 중앙이 이러니 지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아예 공간 자체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연전에 포항시의 초청을 받아 포철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할 때다. 워낙 보수적인 분위기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스타디움을 채운 어른들이 공연의 반이 끝나갈 때까지 미동도 않는데다 시선은 무대가 아니라 무대 앞 왼쪽의, 10대 20대들이 일어서서 열광하는 쪽만 향하고 있었다. 이런 풍경 속에선 같이 호흡하는 공연문화가 만들어질리 만무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난 6월의 자유 공연은 무대와 객석이 한 호흡으로 어우러진, 오랜만의 신선한 경험이었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낌없는 젊음의 힘만이 공연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다. 내쳐 말하자면 한 나라를 운영하는 관리들이 문화를 등지고 살게끔 만든다. 이어령씨가 문화부 장관을 할 때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기도 했지만 장관 한 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재벌쪽은? 눈앞의 돈 벌려고 음반 사업에 뛰어들지 말고 그 돈 좀 제대로 된 문화사업에 투자하면 안 되나
<황진이〉는 드라마 주제가인데 , 판소리적인 멜로디라인을 응용하여 강렬한 리듬을 만들고 거기에 소울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나는 톤을 중요시한다. 정신차릴 틈 없는 스케줄 속에서도 밤에 혼자 스튜디오에 앉아 이펙트들을 연구했다. 사운드에 대한 나의 철학은 리듬을 바탕으로 쌓인 각 악기 파트의 연주와 멜로디가 하나의 메세지로 종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조건 더빙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톤을 많이 알아야 하는 건 그래야만 이 모든 과정에서 끝없는 아이디어를 구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이틀 곡을 뒤로 미루고 〈산유화〉와 〈한강〉, 그리고 뒷면의 〈황진이〉등을 앞으로 내세운 건 앞면 톱에 타이틀 곡을 놓아야 하는 관습 자체가 싫었기 때문이다.
조용필 : 노래는 그 시대의 역사와 추억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로 우리의 노래는 애인과 고향을 꼽아 왔다. 그런데 왜 친구에 대한 노래는 거의 없는가? 그것은 아마도 식민지, 분단, 전쟁으로 이어진 역사가 옆을 돌아볼 틈이 없게 만든 것은 아닐까? 나는 위대한 탄새의 건반주자 이호준과 '친구'라는 화두를 놓고 씨름했다. 슬프고 애상적인 것도 아니고 〈잘살아보세〉류의 건전가요도 아니면서 어떤 정신적인 힘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것... 이 노래는 장르의 문법이 없다. 그러나 이 노래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처음부터 확신이 섰다. 즉 이 노래는 '친구'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수용자의 나이와 스타일을 초월할 수 있는 노래가 될 수 있으리라는 판단말이다. 실제로 이 노래는 공식석상에서도 창피해하지 않고 많이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이런 계열의 노래가 9집의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와 13집의 〈꿈〉이다. 쑥스러운 말이지만 내가 만든 노래중의 명곡이라고 생각한다.
강 헌 : 하지만 84년의 6집은 완성도에 있어서 산만할 뿐만 아니라 〈정의 마음〉을 제외한 거개의 노래가 다른 작곡가로부터 받아 채움으로써 당신과 위대한 탄생의 아이덴티티를 거의 포기하다시피한 앨범이 아닌가?
조용필 : 그렇다. 2집이 그러했듯이 6집 역시 살인적인 스케줄과 1년에 앨범 하나이상을 내어야 하는 음반사의 관행에 시간이 버텨내지 못 했다. 그것은 85년 상반기 7집의 폭발 이후 연이어 하반기에 나온 8집도 마찬가지이다. 이러다간 자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압박감 아래서 다른 사람의 곡으로 6집을 만들 때 이미 7집의 곡을 쓰고 있었고 , 하나에 집중하고 하나를 건너뛰는 징검다리 배팅이랄까 , 비즈니스의 룰 속에서 나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강 헌 : 7집으로 당신은 명실상부한 제왕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이 앨범은 풍부하고 성숙한 감정이입이 실현된 발라드 〈눈물로 보이는 그대〉로 시작하지만 로큰롤의 열기가 앨범 전반을 관통한다. 한마디로 폭발적으로 질주하는 조용필 록의 비등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30대 중반에 다다른 당신에게 로큰롤은 어떤 것이었는가?
조용필 : 미국에서는 두번째 박자에 턱이 앞으로 나오면 히트한다는 속설이 있다.
이 느낌이 모든 록의 기본이다.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 80년대 초중반 나의 음악에 열광하던 이 땅의 10대들은 록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 세대에게 록의 대중적인 모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죽을 때 나의 음악은 이것이다라는 바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나의 음악이 그저 흘러가는 소모품이 되고 싶지는 않다. 〈창밖의 여자〉와〈비련〉같은 발라드까지 강렬한 파워를 내뿜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노래의 근원에 록의 에너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록이 좋다, 젊음이 좋다, 이 시대를 음악으로 얘기하고 싶다. 그것의 불만, 흥미, 거짓, 사랑을 얘기하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이 시대의 가장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제, 오늘 그리고〉와〈미지의 세계〉, 〈여행을 떠나요〉같은 노래를 만들 때 나는 더 이상 젊지는 않았지만 난 젊음의 대변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폭력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그러나 그 분노만 얘기해서는 안 된다. 폭력 그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서태지나 신해철, 강산에 같은 90년대의 젊은 아티스트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대범함과 자유분방한 표현력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좀 건방지게 말한다면 90년대의 음악이 획기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템포 120의 강렬한 로큰롤만이 아니라 이제는 한국의 젊은 힘을 통일시킬 장르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세가 원망할 것이다. 언제나 시작이 반인 법이다.
조용필 : 8집은 한마디로 성인세대에 대한 서비스다. 이 세대의 호응은 좋았지만 밑 세대가 많이 떨어져 나갔음을 당시의 콘서트 때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삶에 대한 확신을 노래한 것이다. 확신이 없는 삶은 무가치하다. 운동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투쟁은 외로운 것이다. 하려면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한때 투쟁했다 그만두면 안 한 것보다 못하다. 그래서 나는 한번도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아마도 동연배가 아닐까 하는데, 김민기가 대단하고 멋있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음악으로 투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87년, 9집을 발표할 때 나는 개인적인 불행과 맞물려 정신적으로 방황을 거듭했다. 쉬어야 되는 거 아닌가? 나란 인간은 뭐냐? 회의가 회의를 물고 맴돌았다. 그런 가운데 〈청춘시대〉의 기타 솔로가 잉베이 맘스틴의 표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타를 맡았던 당시의 멤버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그 노래의 홍보를 그만 두었다. 가장 힘든 시기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양인자, 김희갑 두분의 인연이 맺어지는 데 기여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음악 생활 20주년을 기념하는 10집의 파트Ⅱ 앨범은 그 콤비에게 맡기고 싶었고, 그 나머지 시간을 90년대를 맞이할 준비에 착수했다. 91년의 〈꿈〉도 이미 그때 만들어놓은 작품이다.〈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은 70년대에 블라인드 페이스의 〈Do What You Like〉를 했던 기억을 상기하며 희갑이 형과 음악 드라마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한 결과물이다.
조용필 : 90... 무엇보다도 80년대의 옷을 벗어야 했다. 하물며 톤까지도. 12집 〈추억속의 재회〉부터 사운드가 강렬하고 무거워졌으며(특히 13집의 B면이 그렇다) 무엇보다 진지해졌다. 대중의 반응에 사로잡히지 않고 록을 바탕으로 서양의 클래식적인 요소, 중국의 민속 악기(14집〈이별의 인사〉에서 쓴 二湖), 라틴 계열의 퓨젼 리듬을 다양하게 접목해 본 것이다. 80년대엔 사실 탁성도 그리 많이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음반사로부터 독립도 했으니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더 가득 찬 소리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기의 분위기는 14집 홍보를 할 때 피부로 느꼈다. 〈슬픈 베아트리체〉에 이어 〈고독한 러너〉를 내보냈는데 92년 가을의 모든 채널은 랩 댄스뮤직으로 몰려갔고 그 노래는 제목처럼 더이상 힘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위대한 탄생에게 거개의 트랙을 맡겨본 후속 앨범 15집까지 최악의 실패를 기록했다고 해서 나는 슬퍼하거나 노할 까닭이 없었다. 역사는 지나고 나서야 역사다.
조용필 : 뮤지컬은 내 필생의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 가면 틈만 나면 뮤지컬을 보았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거미 여인의 키스〉는 돈을 주고 번역한 대
본을 보면서 아홉 번을 관람한 적도 있다. 내년 30주년 활동을 벌인 뒤 뮤지컬은 3년 정도의 시간을 집중해서 다시 도전할 것이다. 밀릴 때는 철저히 밀려야 한다. 이 말은 슬럼프 조차도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버티다간 앞으로 고꾸라진다. 아예 내 손으로 내 구덩이를 판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모든 폭풍이 지나고 난 뒤 그때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각오가 중요하다. 자신만만하게 쓰러져야만 자신감 있게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조용필 : 나는 기타만큼이나 키보드의 웅장하고 화려한 세계를 사랑한다. 그래서 그냥 달리는 심플한 록보다는 핑크 플로이드 같은 사운드 메시지가 충만한 록을 좋아한다. 톰 킨은 13집에서 신선한 경험을 안겨준 인물로, LA에서 내가 머물던 플로리다로 날라와 2박3일 간 피아노도 치고 기타도 치면서 준비해 간 6곡의 미팅을 마쳤다. 오케스트레이션이 필요한 나머지 곡을 맡은 제러미 러복은 영국 출신으로 아주 비싼 65세의 베테랑이다. 이번 16집의 핵심은 무리를 하지 않는 것, 가장 중용적인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었다. 승부를 내는 것은 내년의 30주년 17집이라고 보았고 , 따라서 히트를 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내년의 앨범에선 나는 16집과는 다른 전략의, 30년 전의 초심으로 달려간 음악을 선보일 것이다. 즉 내 나름대로 록을 정리할 것이며 슬로우곡 또한 그 기조에서 정리할 것이다.
진정한 록은 무엇인가?
나는 다시 이 질문에 도전하려고 한다. 록은 떠드는 것이냐, 얘기해야 하는 것이냐, 함께 나누는 것이냐?
나는 아직 모른다. 만들면서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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