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팬클럽 미지의 세계 Cho Yongpil Fanclub Mizi

열린 게시판

2

형님의 역사

TR, 2008-01-13 20:04:12

조회 수
1541
추천 수
34
일곱 살 되던 해 가을,

달빛이 무척 밝았던 밤 멀리서 들려오던 하모니카의 선율이 음악과의 첫 만남이었다고 고백하는 조용필은 국내에서 인기와 음악성 모두 최고의 인정을 받은 가수다.

그의 가창력은 아직도 모든 가수들이 꿈꾸는 선망의 경지이며,
오빠부대를 최초로 이끌때부터 '바람의 노래'로 다시 주목을 받을 때까지,
그는 내내 실질적인 인기순위1위는 물론 역대 최정상의 위용을 뽐냈다.

그가 오버그라운드에 군림함으로써 언더그라운드의 모든 기수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과대포장하지 않았고 그가 있음으로 다양한 장르가 조명받았다.

비록 1980년대 내내 아무런 저항이나 반정부적 구호 하나 외치지 않았고 발전을 위한 2인자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현재 그를 미워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것은 기교와 센세이셔널리즘을 넘어 일정한 경지를 몸소 터득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당분간 이런 가수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중.고등학교 시절, 기타를 끼고 살았던 그는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집을 가출한다.

이후 7년 동안 첵돌스, 파이브 핑거스 등의 그룹을 거치며 파주 일대의 미군기지에서 활동했던 그는 오로지 음악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만을 체득한다.

어느 날, 한 미군병사가 신청한 재즈뮤지션 바비 블랜드(Bobby Blend)의 'Lead me on'은 그의 음악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친 그룹 애드포(AD4)의 드러머 김대환을 만나게 해 준다.

당시 업소에서 소울 계통의 음악을 자주 불렀던 그는 이 신청 곡을 접수한 뒤, 밤무대의 중요한 레파토리로 선정했고, 이 노래를 들은 김대환은 그에게 팀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김대환, 이남이, 최이철 등 쟁쟁한 뮤지션이 합류한 그의 새로운 팀은 리더인 김대환의 성을 딴 김트리오였다.

후에 김대환이 매니저로 물러서고 4인조가 된 이 그룹에서, 조용필은 청음, 채보 하는 법 등을 배웠으며 지독한 연습으로 일취월장했다.

이 팀은 선데이 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에서 'Lead me on'을 번안한 '님이여'란 곡으로 최우수 가수왕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김대환의 해체 선언으로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군 제대 후 조갑출과 그룹 25시에 잠시 몸담았던 그는 미국의 재즈록 그룹 시카고(Chicago)의 영향을 받아 8인조 브라스 밴드인 조용필과 그림자를 만들고 당시 인기 있던 서울의 고고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김트리오와 조용필과 그림자 시절 각각 한 장의 음반을 냈던 그는, 축구선수 이회택과 조갑출을 통해 소개받은 박성배를 만나 첫 솔로 음반을 제의 받는다. 그리고 최초의 메이저 히트곡을 터트린다.


부산이라는 지명 때문인지는 몰라도, 부산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원래는 4분의 2박 트로트 음악이었지만 4분의 4박형 트로트 고고로 편곡한 곡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저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했으며 세인들의 가슴을 파고들기까지는 몇 개월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이 짧은 기다림은 그에게 다가올 80년대의 영광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했다.

조용필은 벅찬 감격에 젖어 그 뜨거운 반응을 만끽했으며 방송 출연 및 밤무대를 휩쓸었다.

그러나 파이브 핑거스 시절 몇 대 피웠던 대마초는 1975년 휩쓴 대마초 파동 때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정부의 활동정지처분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1977년 “톱 싱어가 되기보다는 음악 하는 사람으로 계속 머물기를 바랐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은퇴 선언으로 세상에 이별을 고한다. 휴식기에 TV 드라마에서 본 '한오백년'이라는 창을 들은 그는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와 같은 탁성을 내고 싶어 명산을 찾아다니며 발성연습을 시작했다.

진도 아리랑, 성주풀이, 흥부전까지 소화하며 목을 틔운 그는 급기야 피를 쏟았으며 부은 목이 가라앉을 시점이 되서는 그토록 원하던 목소리가 비로서 시원스럽게 터져 나왔다.

그는 용기를 얻고 베이스 주자 유재학과 조용필과 그림자란 팀을 이끌며 부산, 서울 등지의 밤무대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대마초가수라는 오명을 벗기는 힘이 들었으며 그의 전과를 알아본 팬들 때문에 금방 금방 쫓겨났다.

다시 방송에 설 수 있게 되기까지는 1979년 대마초 연예인 완전해금조치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가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은 1980년 초 동아방송 연속극 <창 밖의 여자> 주제곡을 작곡하면서부터였다.

지금 들으면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이 가사에서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는 결정적 문구는 절대적인 지위를 얻었고 같은 앨범 수록곡 '단발머리', '한오백년' 등의 히트곡으로 인기 지형의 급 물살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는 유재학을 매니저로 하고 김청산, 이건태, 이호준, 곽경욱, 김택환을 멤버로 하여 1980년대를 가로지른 실력파 그룹 위대한 탄생을 출범시키기에 이른다.

조선일보 선정 건국 이후 최고의 가수 자리를 차지한 조용필의 후일담은 우리가 모두 아는 대로 살아있는 전설 그 자체이다.

1980년대 그의 아성에 도전한 이는 이용, 김수철, 전영록 정도였으며 그리 길지 못했다.
그의 활동은 일본과 중국을 가로질렀고 국내 음악씬을 초토화시켰다.

그는 오빠부대의 원조이며 모든 장르를 국내 음악에 이식시킨 공로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제쳐두더라도 그가 쏟아낸 히트곡은 역사상 최고의 수준이다. 1998년, 그는 음악 인생 30주년을 맞아 그간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곡들을 모아 기념음반을 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이런 가수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행복이다.

영화나 TV에 기웃거리지 않고 후배 자신들도 인기와 음악성만으로 끝까지 사랑 받을 수 있다는,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뮤지션이라면 한번 도전해 볼만한 일 아닌가?

글/ 2001/05 지운



조용필에게 있어 '위대한 탄생'은 .... 시작부터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출발한 조용필에게 있어 '위대한 탄생'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분신과도 같은 존재이다.

현 시점에서 밴드 '위대한 탄생'은 다각적인 시각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즉, 한국대중음악사의 대표적인 인물 '조용필'의 음악을 지근에서 함께해 온 그룹이었다는 점,

매 시기 당대 최고 실력자들의 집합처 역할을 해오며 연주와 녹음, 편곡, 스타일 등에서 한국 대중음악계를 견인해 왔다는 점,

그리고 25여년의 긴 명맥을 이어온 국내 최장수 밴드라는 점 등으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역사는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4년 결성되어 5년 가량을 부산 등지에서 활동해오던 그룹 '조용필과 그림자'는 1979년 대마초 연예인 활동 규제 철폐와 더불어 밴드 이름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으로 개칭하고 새로운 시대를 기약한다.

1980년 <창밖의 여자>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 조용필은 그 해 9월, 통상적으로 위대한 탄생 제1기로 알려져 있는 곽경욱(리드기타), 김택환(베이스), 김청산(키보드), 이건태(드럼) 라인업을 출범시킨다. 이 위대한 탄생 1기 멤버들은 조용필의 초기 명반으로 손꼽히는 3집과 4집 앨범의 음악들을 함께 하게 된다. 또한 객원멤버이기는 했지만 이호준이 공연마다 함께하면서 더욱 풍성한 음악을 선사하였다.

1983년 4월, 일본 NHK홀 라이브 공연을 앞두고 위대한 탄생을 프로젝트 그룹형식의 백밴드로 재편하면서 송홍섭(베이스), 이호준(키보드), 변성룡(키보드), 김석규(기타),백천남(드럼), 유상윤(색소폰)등을 맞이하였다. 이들 2기 위대한 탄생의 <한오백년> <간양록> 연주는 외국공연에서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1983년 NHK홀 라이브 공연 이후 위대한 탄생은 송홍섭과 이호준을 필두로 김정위, 박청귀, 최진영 등이 주축을 이루며 1980년대 중반(1983~1985) 조용필의 활동을 뒷받침한다. 조용필의 대표적 명반으로 꼽히는 7집이 발표되고,

"84 펙스 뮤지카" "84 무도관 공연" 등 수준높은 외국공연이 이어지던 바로 그 시기였으며, 김광민 정원영, 유재하 등 지금도 역대 위대한 탄생의 멤버로 자주 거론되는 음악인들이 참여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1986년 이후로는 김희연, 유영선, 배수연 등이 위대한 탄생의 대표적인 멤버로 팬들의 뇌리에서 기억되고 있다.

위대한 탄생은 수많은 실력파 뮤지션들이 가입과 탈퇴를 거듭하였는데,

이는 1980년대 중반이후 위대한 탄생의 성격이 그룹에서 솔로뮤지션을 뒷받침하는 백밴드의 성격으로 좀 더 강하게 흘러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의 집합처라는 공식은 여전히 유효하였으며 위대한 탄생의 이력은 그 자체로 뮤지션들 사이에서 강한 선망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위대한 탄생을 거쳐간 뮤지션들로는 박강호 ,최이철, 김효국, 배수연, 유영선, 최진영, 임동신, 김희연, 정원영, 이중산, 전태관, 김종진, 유재하, 김광민, 김창남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위대한 탄생 라인업 변동에 대한 정밀한 고찰은 향후 심층적인 연구가 더 필요한 숙제로 남겨져 있다.

1980년대 말, 조용필의 주 활동무대가 일본으로 옮겨짐에 따라 일본 내 백밴드 "괜찮아요"가 만들어지며 이에 "위대한 탄생"은 1990년대에 들어 잠시 해체되기도 했으나 1993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진 음악인생 25년 기념 콘서트를 계기로 조용필은 위대한 탄생을 다시 부활시켰다.

당시 멤버는 최희선(기타), 이태윤(베이스), 김희현(드럼), 최태완(피아노), 한정호(키보드), 김영길(키보드)이었다.

이들은 세종문화회관 공연의 완벽한 연주를 시작으로 매년 50회가 넘는 조용필 공연을 통해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밴드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후, 드럼의 김희연이 KBS 관현악단으로 옮기면서 창단멤버였던 이건태가 다시 복귀하였고, 이종욱이 새로 가세하면서 2003년까지의 조용필 공연을 계속 이끌어왔다.

2004년 이후 드러머 이건태를 김선중으로 교체하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위대한 탄생 멤버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기타 최희선은 1977년 데뷔해 최헌의 불나비, 검은장미, 록코리아 등의 그룹에서 활약하다 1985년부터 스튜디오 세션과 음반 프로듀서, 편곡자로 활동하였다.

1991년부터 심신 이승철과 그룹 '미래로'를 결성하여(이태윤, 김희현, 최태완과 함께) 활동하던 중 19933년 재결성된 위대한 탄생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베이스 이태윤은 1984년 그룹 부활의 창단 멤버로 데뷔해 1986년에는 송골매의 베이스를 담당허기도 했다.

1990년부터 이승철,신승훈등 인기가수들의 라이브 세션으로 활약하다 1993년 역시 위대한 탄생의 재결성 멤버로 가담했다.

피아노 최태완은 대학시절 그룹 다섯손가락으로 음악을 시작했으며, 1993년 조용필에 발탁되었다.

건반 이종욱은 벗님들, 송골매, 사랑과 평화를 거친 관록파이며, 1995년 위대한 탄생 위대한탄생에 가세하였다.

드럼 김선중은 1987년 이선희와 한강으로 활동하였으며, 2004년 'PIL & FEEL' 공연부터 합류한 위대한 탄생의 신규멤버이다.10여년의 팀워크로 다져진 위대한 탄생은 완벽에 가까운 절제된 사운드는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비롯하여 수차례에 걸친 예술의 전당 공연, 35주년 기념공연 등 수백건에 달하는 라이브 무대를 통해 조용필을 훌륭히 보좌하고 있으며,

최고의 밴드라는 자부심속에 조용필 음악의 충실한 동반자로서 그 위대한 명성을 지켜나갈 것이다.

출처: 팬까페 / http://www.choyongpil.net/Ver4/



2 댓글

우주꿀꿀푸름누리

2008-01-13 21:59:27

바람의 소리 ? ^^

TR

2008-01-13 22:36:47

글쓴분이 좀 피곤하셨나봐요ㅋㅋ

Board Menu

목록

Page 366 / 1680
Statu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CHO YONGPIL-가황(歌皇), 조용필을 노래하다』 대백과사전&악보집 도서 기증

13
필사랑♡김영미 2023-07-10 3533
  공지

가황(歌皇), 조용필을 노래하다 이 책을 드리면서....

12
  • file
꿈의요정 2023-05-18 3630
  공지

[주문신청]가황,조용필을 노래하다-대백과사전/악보집

40
일편단심민들레 2022-12-13 8120
  26289

{ YP 4○ } 신년특집 조용필40년 - 단발머리

1
우주꿀꿀푸름누리 2008-01-15 1335
  26288

{ YP 4○ } 무대 뒤 또다른 조용필

4
  • file
우주꿀꿀푸름누리 2008-01-15 1532
  26287

[40주년특집] 나의 소원 3가지 릴레이 1

4
弼님의 눈 2008-01-15 1149
  26286

MBC문화방송 항의방문

2
송파장원장 2008-01-14 1740
  26285

[40주년 특집] - 온라인 참여마당 예고

11
우주꿀꿀푸름누리 2007-12-30 1943
  26284

{ YP4○ } 1987년 8월 19일 팍스뮤지카 서울공연

2
  • file
우주꿀꿀푸름누리 2008-01-14 1495
  26283

{ YP4○ } 건강정보-(1)

1
우주꿀꿀푸름누리 2008-01-14 1426
  26282

형님의 역사

2
TR 2008-01-13 1541
  26281

[동아일보] 내마음속의 ☆ 스타가 말하는 스타 (서적)

우주꿀꿀푸름누리 2008-01-12 1630
  26280

{ YP4○ } 이보다 귀여울순 없다. 홍" 홍 "

3
  • file
우주꿀꿀푸름누리 2008-01-12 1667
  26279

안녕하세요~

4
송파장원장 2008-01-12 1335
  26278

------** [보][물][찾][기] **------

16
곽!노!선! 2008-01-11 1999
  26277

[주간한국] 우리시대의 명반 명곡

3
우주꿀꿀푸름누리 2008-01-11 1168
  26276

눈이 오면 용필오빠가 보고잡다 -함께 불러 BoA요-

12
부운영자 2008-01-11 1523
  26275

잊을 수 없는 그 날...릴레이(10)

7
弼心으로 대동단결 2008-01-11 1351
  26274

[ YP 4☆ ]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길쭉한 카렌다

6
  • file
우주꿀꿀푸름누리 2008-01-11 1449
  26273

[Korea Daily] 조용필 40년, 울고 웃던 40년···그는 노래로 '세상 그늘' 지워 나갔다

1
ypc스타 2008-01-10 1528
  26272

[ YP 4★ ] 오빠 어렸을 적에... 모습 2

6
  • file
우주꿀꿀푸름누리 2008-01-10 1735
  26271

‘가왕’ 조용필의 실용정신

4
TR 2008-01-10 1165
  26270

********** 젊은 청춘의 폭팔 **********

9
곽!노!선! 2008-01-10 1543

공식 미지 트위터

뉴스 - News

조폐공사, 조용필 50주년 메달 수익 음악 영재 발굴에 기부

조폐공사, 조용필 50주년 메달 수익 음악 영재 발굴에 기부 조폐공사, 조용필 50주년 기념 메달 수익금 '음악역 1939' 전달식 (왼쪽부터 조폐공사 류진열 사업 이사, 김성기 가평군수, 음악역 1939 송홍섭 대표) [음악역 1939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한국조폐공사가 제작한 '가왕' 조용필 50주년 기념 메달 판...

뉴스 - News

조폐공사, 조용필 메달 수익금 일부 음악영재 '후원'

조폐공사, 조용필 메달 수익금 일부 음악영재 '후원' 한국조폐공사(사장 조용만)가 '조용필 데뷔 50주년 기념메달' 판매 수익금 중 일부를 음악영재 지원 사업에 후원한다.   공사는 11일 경기도 가평 뮤질빌리지 '음악역 1939'에서 조용필 데뷔 50주년 기념메달 판매 수익금 가운데 2500만원을 가평군과 함께 가평뮤직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