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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센스 12월호 기사

정해주, 1999-12-02 07:05:23

조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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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우먼센스 12월호 기사-------

스폐셜 인터뷰

대중가수의 보통명사 조용필.
그가 예술의 전당 오페라홀에서 가수생활 30년을 마무리하는 공연을 갖는다. 30년이라는 시간을 노래에 목숨을 걸고 살아온 그의 모습에서도 이젠 세월이 주는 연륜이 자리잡고 있다.
조용필의 노래 인생 30년.

대중가수 최초로 예술의 전당 오페라홀에서 공연하는 가수 조용필
"가수생활30년, 누구보다 화려했던 인기속에서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

엄청난 카리스마와 열정으로 관객을 휘어잡는 당대의 최고의 가객 조용필. 채170센티미터가 되지 않는 작은 체구이지만 혼 몸에서 뿜어나오는 듯한 힘은 그가 지난 30년 동안 어째서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라 불리는지 짐작케한다.
때문에 그를 무대아래서 만나는 일은 낯설음을 동반한다. 무대위와 무대 아래 불과 1미터 남짓한 그 공간의 차이는 무척 크다. 무대 아래의 그는 동네 어귀 구멍가게 차일 아래 365일 진을 치고 앉아 "정치판부터 이웃집 경조사까지' 알뜰히 챙기는 하릴없는 동네 아저씨의 이미지와 그리 멀지 않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근처에 위치한 팔레스 호텔2층의 중식당으로 기자를 부른 그는 가죽 재킷 안에 깔끔한 흰색 스웨터를 받쳐 입은 옷차림에 꽤 신경쓴 티가 역력했다. "우리는 한다고 하면 또 제대로 하잖어? " 하며 털털 웃는다. 음식값이 꽤 나갈 법한 호텔 중식당에서의 인터뷰. 하지만 실상은 '집에서 가깝고 , 사람 만나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곳' 이라 약속 장소로 정했다는 것이다. 호텔 중식당이라고는 하지만 동네 구멍가게의 차일 아래에 있는 듯한 느낌은 호텔이라는 공간이 주는 낯설음보다는 그의 집 근처라는 생각이 더 앞섰기 때문이었다.
지난 8개월간의 휴식.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지난 2월부터 9월까지 그는 아내 안진현씨와 함께 미국과 남미, 유럼, 아프리카를 여행했다고 한다. 가수 생활을 시작한 이래 그렇게 오랜 기간을 작정하고 논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이 생기가 흘렀다.
"원래 내가 연초에는 일을 잡지 않아요. 그런데 올해는 98년부터 시작해서 올 2월까지 쉬지않고 스케줄이 잡혀서 피곤하기도 했고, '좀 쉬어야 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또 마침 결혼5주년이 되는 해 이기도 해서 마누라랑 플로리다반도 일주여행을 했어요. 침대 칸도 딸린 차를 빌려서 다녔는데 재미있더라구."
그렇게 시작된 여행은 남미로 유럽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사실 웬만한 나라의 어지간한 도시치고 안 가본 곳이 없는 그이지만 공연을 하러 갔던 경우가 대부분이라 여행이라는 명목하에 떠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은 나폴리였어요. 세계 3대 미항이라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태리는 갈 기회가 없었어요. 그래서 마음먹고 갔죠. 그런데 생각했던 것하고는 많이 틀리지 뭡니까? 조용하고 오붓한 분위기를 기대했는데 관광지라 그런지 떠들썩해서 별로 좋지 않더라구요.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던 아프리카가 인상적이었요."
그를 아프리카로 데려간 것은 다름 아닌 그의 히트곡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었다고 한다. 탄자니아의 관광청이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불러 탄자니아 홍보에 큰 역할을 한 공로를 높이사 그를 초청한 것이다.
"처음엔 좀 망설였어요, 물론 언젠가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었지만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나 할까? 솔직히 겁이 난 거죠. '혹시 무서운 병이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그런데 마누라가 '꼭 가보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에라 , 그러면 가자'하고 나섰어요."
조용필의 수많은 히트곡 중 특히 가사가 아름다운 곡으로 꼽히는 '킬리만자로의 표범' 의 나라 탄자니아. 그곳은 막연히 상상했던 아프리카의 이미지보다 훨씬 웅장하고 생생한 곳이었다. 산허리에 구름을 두른 채 만년설을 이고 앉은 킬리만자로는 그 아래로 세월을 헤아릴 수 없는 아름드리 고목의 밀림을 딛고 서 있었다. 산으로 가는 등산로 입구에서 반나절 동안 오르다 내려온 곳이 전부였지만 그는 킬리만자로의 위용에 압도되었다고 말했다.
"엄청나게 큰 분화구 분지에도 갔었고 하늘과 땅이 맞닻은 대평원을 직접 가로 질렀는데, 그 느낌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예요. 꼭 다시 가고 싶고 그때는 글 쓰는 분과 함께 가서 그 느낌을 노래로 만들고 싶어요."
플로리다반도에서 시작해 아프리카까지의 여행 편력을 그는 처음 소풍다녀온 초등학생처럼 신나게 이야기했다. 음악에 관한 화제를 제외하고는 말수도 적고 감정 표현도 적극적이지 않은 그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 그런 그에게서 느낀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으레 식사를 하면 소주나 맥주를 반주 삼던 그가 술을 권하자 거부를 하는 것이었다.
"많이 줄였어요. 담배는 끊었고, 결혼하고 나서 마누라한테 매번 잔소리 들으면서 끊어야겠다고 생각만 했었거든요. 그러다 올 초에 독하게 마음먹었어요. 4개월 동안은 완전히 끊었는데 , 지금은 아주 끊지는 못하고 담배는 하루 2~3개피 정도만 피우고, 술은 가끔 마셔요. 물론 많이 마시지는 않아요.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구."
그도 선선히 인정한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마누라' 안진현씨가 있음을. '내 나이쯤 되면 슬슬 말년이 두려워진다'는 그의 말이 단순히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나이드는 게 이런 건가 봐요. 결혼 5년째인데다 서로 나이가 있으니까 연애하는 기분은 없지만 이젠 옆에 없으면 허전해요. 딱히 뭘 챙겨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냥 없으면 불안하더라구."
하긴 가수생활만 30년이다. 강산이 바뀐 횟수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이른바 조용필시대인 70~80년대만 해도 어느덧 '그때 그 시절'로 꾸며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지난 해 가수데뷔 30주년에 대한 감회를 말한 그였지만 '새 천년'을 얼마남겨 두지 않은 지금의 느낌은 또 다른 듯 했다.
"30년, 이렇게 생각하면 긴 시간이지만 정작 내가 가수생활한 지 30년이 되었다고 하니 '참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돌이켜 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음악도 미숙한 부분도 많고. 그때 만든 노래를 들으면 '지금 같으면... ' 하고 후회도 하죠.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많은 것을 했다는 거예요."
가수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은 지난 30년에 대해 그는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화려한 무대 인생을 산 그가 지난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지난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중요한 것은 지금하고 미래라고 생각해요. 왕년에 내가 가수왕을 열 한번 했다든지, 그때 우리 집 앞에는 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들 그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런 생각 오래할수록 병만 들어요. 오래전. 그러니까 처음 인기라는 걸 얻을때부터 독하게 마음 먹었어요. 언제가는 반드시 미끄러질때가 올 거라고. '가요무대' 에 쟁쟁했던 선배들이 나오는 걸 보면 내 미래가 바로 저런 것이라고 나 자신 속에 있는 자만심을 죽였어요. 그리고 오직 음악한 가지만 생각하자고 다짐했죠. 지금까지 그 생각으로 온 거예요."
가수가 아닌 자연이 조용필의 30년 역시 그는 마찬가지라고 한다. 당대 최고 스타와 염문, 첫 결혼의 실패 등 결코 순탄치 않았던 생활이었지만 그는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다 팔자였던 것 같다' 는 말로 정리했다. 모든 일은 억지로 되지 않고 순리대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다는 깃이다.
"가수가 된 것도 그래요. 난 한번도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꾸지 않았거든. 누구나 그랬지만 나도 미래 희망이 뭐냐요 하면 대통령, 조금 커서는 장군 뭐 이러 식이었지. 더구나 가수에 대한 인식이 '딴따라'였으니 되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없었죠. 그냥 운명이었다는 생각을 해요. "
어쩌다 보니 가수가 되어 있더라는 식으로 가수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는 그이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가수라는 직업에 대해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가수로서 나아갈 방향이 보이지 않을 때 힘들어 한 적은 있어도 , 그만 두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그이다.
"대마초 파동으로 3년간 활동을 정지당했을 때예요. 그때 내 나이가 스물일곱 이었는데 그때는 참 미치겠더라구. 그래서 밀항할 생각을 했어요. 부산으로, 어디로 다니면서 일본이나 미국으로 건너갈 방도를 찾기도 했죠. 그땐 이 나라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만약 그때 밀항을 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어요. 그대로 음악을 했을지, 아니면 다른 직업을 가졌을지는. "
조용필은 가수라는 직업을 '문화 권력'으로 까지 끌어올린 대표적인 인물이다. 요즘의 10대들이 가장 되고 싶어하는 직업 중 늘 1,2위를 다투는 것이 가수인 것은 바로 젊은 시절 조용필의 오빠 부대였던 소녀들이 지금 10대들의 부모 인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도 그는 자신이 직접 해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저 음악으로만 묵묵히 밀어붙였을 뿐이라는 것. 그더다보니 인기도 얻게 되고, 사회적인 지위나 평가 등이 따라오더라는 것이다.
"공연을하면 아직도 외국까지 따라오는 팬들이 있어요. 얼마전에 대전에서 공연할때인데 어떤 관객이 쪽지를 건넸더군요. 내용이 '오빠 따라다니다 내 청춘 다 갔다'는 거였어요. (웃음) 내가 그랬지, '이 편지 이거 누가 쓴 거야! " 그랬더니 맨 앞에 앉은 한 여자 관객이 손을 들더군요. 사실 전 가수가 관객에게 끌려다녀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무대에서 당당할 수 가 없어요. 그래서 난 좀 팬들에게 일부러 무뚝뚝하다 싶을 정도로 대해요. 사실 속마음으로야 고맙죠."
조용필에게는 요즘 팬클럽의 원조격인 '이터널리'라는 팬클럽이 있다. 영원한 오빠의 팬으로 남겠다는 뜻을 가진 이 클럽은 따로 회보를 발간할 정도로 열성적인 팬들의 모임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조용필은 '고맙다'거나 , 지나가는 안부조차도 잘 묻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을 향한 이들의 관심과 염려에 대해 나름대로 애정을 담아 이렇게 말한다.
"늦었으니 빨리 집으로 가!"
맨 앞에서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 사람의 고독을 누가 알까. 그는 그렇게 지난 30년을 달려왔다. 설사 대중가요의 중소비자인 140대들의 환호는 멀어졌지만 그는 애초 자신에게 환호했던 이전 세대들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일정 거리를 유지했던 까닭에 지금까지 당당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외로웠다고 한다. 속내를 선뜻 드러내지 않는 그이기 때문. '그래서 더욱 요즈음 마누라 없이 지내지 모양이야'이라면 쓰게 웃는다.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다는 자체가 저한테는 그리 큰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아요. 오히려 공연 내용을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한 거죠. 뭔가 정리하는 무대이기 때문에 좀 저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아요. 내용은 음악사를 정리하는 형식으로, 1부 ,2부, 3부로 나눌 생각이에요, 1부는 80년 이전 흑백 시대를, 2부는 이후 컬러시대를 담고, 3부는 미래를 주재로 담을 예정이죠. "
요즘도 그는 매일 같이 노래 연습을 한다. 당대 최고의 가객이라는 칭송을 받는 그이지만 노래 연습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는 '목소리를 최상으로 유지하는 비결은 노래를부르는 것 밖에 없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에서 할 때를 제외하고 평소에도 집에서 노래방 기계로 해요. 미국 매릴랜드 집에도 있는데, 남의 노래는 잘 부르지 않고 내 노래만 불러요. 노래 목록책에 나와 있는 내 노래들을 빨간 볼펜으로 밑줄을 쳐 놓고 부르죠. 목을 푸는 데는 '꿈'을 가장 많이 부르는 데 제일 무난한 것 같아요."
그는 자신의 노래 실력이 최고라는 식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것이다. 평가는 순전히 대중의 몫인 셈인데, 설사 자신을 최고라고한다해도 그건 그들의 평가이지 자신의 평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해까지도 늘 음반을 내야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있었어요. 해가 바뀌었으니까 당연히 내야 한다고 까지 생각했죠.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을 작정이예요. 정말 마음에 들때까지 , 언제 끝나든 그렇게 작업할 생각입니다. 지금도 느끼는 것이지만 음악은 하면 할수록 힘든 것 같아요. 따로 끝이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어느새 밤이 이슥해졌다. 처음엔 담배와 술을 멀리하던 그가 담배와 맥주를 조금 입에 댔다. 모처럼의 인터뷰로 많은 이야기를 한 탓이었으리라. 언뜻 그의 얼굴에서도 세월이 느껴졌다. 과거를 돌이키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더 중요시하는 그에게도 세월은 어김없었다는 증거였다.
"나이가 들면 살이 좀 쩌야 한다더니 그렇더라구요. 지금은 체중이 조금 늘었는데 전보다 낫다는 소리를 들어요. 아무래도 살이 찌니까 주름이 펴져서 그런 모양이야. 하하하."
털털한 웃음으로 자신의 30주년을 갈음하는 인터뷰를 마친 가수 조용필. 그가 지난 30년 동안 모든 세대를 통틀어 최고의 가수로 불리는 이유가 조금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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