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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라이프 풀 스토리
끝없는 정상질주, 그것은 아픈 시련을 극복한 자에게 주어지는 위대함인 것이다
조용필,
그는 남들과 무엇이 다른가 한국의 대중가요가 5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각 시대를 대표하는 수 많은 스타들이 끊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눈물젖은 두만강' 과 '동백아가씨' 가 그러했듯이
'돌아와요 부산항에' 를 모르는 한국사람은 없다.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조용필, 조용필!'을 외치며 그의노래에 박수를 보낼 만큼
조용필은 현재 '최고의 가수' 로 정상에 군림 하고 있다.
10년째 수퍼스타 자리를 지키면서 한국과 일본, 미주지역 까지 자신의 음악적인
성을 구축하고 있는 조용필.
작다고 하기보다는 크지 않은 편에 속하고, 부드럽다고 하기보다는 거칠지않아 보이는 조용필.
그러한 조용필이 남들과 무엇이 다르기에 오늘의 위치에 올라설수 있었을까.
이러한 궁금증은 조용필의 가슴에 한 (恨)으로 응어리진 노래에의 집념과 그 집념을 이루고자
몸부림쳤던 '뼈저린 시절'을 되돌아봄으로써 답해질 것이다.
경기도 화성에서 1950년 출생한 조용필.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사춘기 시절부터 음악에 미쳐,
마음을 같이하는 친구 몇 명과 그룹 사운드를 조직해 몰려나왔다.
외국 그룹 사운드 록음악에 왠지 마음이 끌려,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그 흉내를 내려고 악기점을 기웃거리고,
전기 기타를 신나게 치는 것만이 단연코 '음악하는것'으로 통하던 당시에 조용필도
그러한 젊은이들 속에 파묻혀 기타맨의 꿈을 키웠다 어쩐지 기타를 만지고 노래부르는 행위를
정상적인 삶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것처럼 바라보는 주위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나서 본격적인 음악에의 길에 도전하고 나섰다 하지만
음악에의 길은 결코 아름답고 행복한 무지개 빛깔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찬 집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 시절,
미8군 무대에서 연주 활동을 하기도 하고, 야간업소 등을 싸구려 악사로 떠돌아다니며
그럭저럭 끼니를 때우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했다
지금도 가끔 조용필은 그때를 회상하곤 한다.
"돈이 없어 팀멤버들과 문산에있는 자취방에 틀어박혀 끼니를 거른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젊은우리들은 나름대로 진짜음악을 해보겠다고 노력하는데도
업소에서는 '그게 어디 음악이냐' 하면서 받아 주질 않았어요.
가수나 그룹 사운드에게 수입이 생기는 곳이 업소거든요.
그런데 그당시 우리가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것이 고작해야 흘러간 노래반주나 퉁탕거려야 했던게
전부 였습니다.
그래서 고집을 부리며 우리나름의 연주와 노래를 해보겠다고 하면
그 날로 일자리를 잃어야 했습니다."
요즘 인기 가수가 아닌 야간업소의 무명가수,
무명그룹이 어렵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조용필의 그때 그 시절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시 일어서기위해 몸부림쳤다.
기지촌의 떠돌이로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무명의 악사시절을 보내면서도 그는 결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어금니를 다부지게 물면서 밝은 날이 찾아와줄것을 확신했다.
그런 조용필에게 한번의 행운이 찾아왔다.
어찌어찌해서 어렵사리 내놓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노래가 항도 부산을 기점으로
차츰 북상하더니 급기야는 전국 적인 인기가요로 불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비로소 무명의 설움을 벗어나 당당히 대중 앞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내놓은 인기 가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인기도 잠시였다.
대마초 사건이 터지면서 조용필은 또다시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모처럼 얻은 행운이었는데 너무나도 쉽게 자신이 서야할 무대를 잃고만 것이었다.
그때가 76년도.
조용필은 대마초사건으로 인해 4년간 암흑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일체의 방송 활동을 중지 당한 이 4년의 세월은 지금의 조용필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기간으로 작용하게 된다.
대중의 시선에서 물러선 채 눈물을 쏟아야했던 그 기간에 조용필은 좌절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다시 뛰기시작했떤 것이다.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 보다 더 진한 땀을 흘리며 다시 일어서기 위해 몸부림 쳤다.
그리고 언젠가 들려올 무대 복귀에의 소식을 기다리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정립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그의 가슴에는 노래에 대한 '한'이 자리잡았고
그 응어리를 풀기 위해 판소리를 배웠다.
전국 방방곡곡을 자유롭게 여행 하면서 사람의 자취가 드문 깊은 산속에 들어가 굽이쳐 흐르는
폭포수를 선생삼아 목청을 돋구었다.
그리고는 두문불출 몇 날 며칠을 방안에 틀어박혀 장단에 맞춰 목힘을 길러나갔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뜨거운 한을 쏟아 놓을땐 부드러운 성대가 감당하질 못해
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로 부어 올랐고 끝내는 피까지 토해 내면서 조용필의 소리 힘은 단단해져 갔다.
이때 단련한 소리의 힘이 오늘의 위치를 지키는 조용필의 근본이 되고있는 것이다.
왠만한 사람이면 자신의 삶을 다른 방법으로 바꾸기도 했을만한 4년 이라는 기간을
다른 것에 눈을 팔지 않고 오직 한가지 길,
가수의 길을 향해 실력을 연마해 갔다는 점이 보통사람과 그를 구분시켜 주는 확실한 특징이다.
"제가 그때 그냥 주저 앉았다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겠지요.
대마초사건으로 무대를 물러서던 날,
노래가 계속하고 싶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작은거인 조용필을 얽매었던 질긴사슬이 풀리면서 그는 그동안 닦은 기량을 서서히 발휘 하기 시작했다.
규제가 풀린후 내놓은 '창밖의 여자'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그 이후 '고추잠자리' '비련' '촛불' '생명' '친구여' '허공' 등이 연속 히트를 내며
국내 가요계에 전무후무한 신기록을 수립해 나갔다.
'끝없는 정상의 질주'
그것은 쉽게얻어진 행운이 아니다.
쓰리고 아픈시련과 좌절을 극복하고 일어선 자에게만 주어지는 보답인 것이다.
그는 위대하게 일어섰다.
그러나 '위대함'에는 항상 그만큼의 어떤 그늘이 따르는 것일까.
전격적인 그의 결혼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가요계 사상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전대 미문의 기록들을 수립하는 조용필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소문이 되고, 그 소문은 곧바로 구르는 눈덩이 처럼 불어나 장안의 화제가되는 것이었다.
그가 맨처음 '큰구설'에 올랐던게 그의 결혼에 얽힌 것이었다.
서른이 넘도록 결혼에 구체적인 언급이 전혀 없는 빅 스타의 여자관계를 누구도 궁금해하지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모 여배우, 모 여가수등 몇몇과의 끈질긴 스캔들을 뚫고 드러난 그의 결혼 상대자는
전직 국회의원의 딸 박지숙.
단발머리소녀적부터 알고 지내던 박지숙과의 오랜 구설 끝에 조용필은 깊은 산속 절간에서
하객 하나 없이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그의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결혼식을 올리고나서도 그들 부부는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집요한 대중의 관심을 받아야 했다.
하루중 잠자리에 드는 몇 시간을 제외하고는 눈코뜰 새 없이 빽빽한 스케줄과
1년중 반 가까이를 해외에서 보내야 하는 조용필 이었던지라 혹시나 둘 사이에
무슨 이상이 없을까 하는 세인의 의구심을 살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박지숙의 음독자살설이 퍼져 둘 사이에 파경이 오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더욱 가중시켰다.
박지숙의 음독설에 뒤이어 바로 터진 소문이 조용필의 간암 수술설이다.
그의 움직임은 곧바로 '수퍼급구설'을 낳는다
부인의 음독자살설로 곤욕을 치룬 조용필이 가타부타 어떤 해명 한마디 없이 일본으로 떠났고,
일본에서는 또 한차례 공연 펑크 소동이 터졌다.
이러한 굵직굵직한 소문에 시달리면서 지난 5월 28일,
한국일보사 주최 미주 교포위문단의 일원으로 미국공연길에 올랐다.
미주 공연중에 터진 조용필의 간암설은 그의 밴드 '위대한 탄생'의 멤버인 박강호의 중병이
와전된 것으로 한참후에 밝혀졌다.
그러던 끝에 일본 모여가수와의 밀애설이 터졌다.
소문의 진위야 어찌되었든 조용필 그에게는 잠시도 쉴틈이 없이 구설이 뒤따라 다녔는데
그는 그러한 구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톱스타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지난 연말 조용필에게는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슬픔이 닥쳤다.
연로하신 아버지의 사망은 어쩔수 없는 인간의 슬픔이지만 그 슬픔은 오래도록
조용필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톱스타 조용필,
결혼한지 3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애가 없고, 숱한 소문에 시달리고 그러한 '구설'의 진위를 물으면
둘은 시종일관 똑같은 대답으로 소문을 일축하고 있다.
둘의 생활에 대해 박지숙은 이렇게 말한다.
"어머님은 아버님을 잃으신 슬픔 때문에 몹시 심약해 계셔요.
제가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신경을 써드려야 해요.
남편도 전보다는 훨씬더 자주 전화를 해주곤 해요.
그 사람은 워낙 음악을 좋아하고 또 쉬고 싶어도 쉴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는걸 제가 잘 알아요.
남들처럼 오손도손 살수 없다는 것은 제가 이미 각오했던 일이고
그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참고 기다릴 뿐입니다."
조용필은 아직도 갈길이 무척 바쁘다.
그는 자신의 전성기를 앞으로 길어야 5년일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 동안에 어서 세계적인 가수가 되어야겠고,
언제나 마음대로 노래할 수 있는 개인콘서트 홀을 갖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움직일 때마다 '구설' 을 창조해내는 스타,
그가 국내에 있건 없건 줄기차게 그에 대한 소문들이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는 구설의 스타,
그러나 조용필은 그러한 구설을 상쇄시킬만한 노래를 줄기차게 만들어 내고 있다.
조용필,
그는 이시대 대중의 관심사를 끌고 나가는 증후군의 일각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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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댓글
필사랑♡영미
2003-07-10 20:45:51
자료가 정말 많으시네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