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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세 조용필
그 ‘不滅’의 세가지 이유
“아직 인기가 있을 때 한발 물러나는 것,
그것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부터 방송 출연과 음반 내는 횟수를 극도로 자제했죠.
당장의 인기보다 멀리
가야 한다는 자기보호 본능이랄까… .”
국민가수 조용필, ‘정상에서의 롱 런’비밀.
★질리지 않는 ‘마라톤 스타’ ★
이미 한해전 그는 한차례 신체검사를 받았었다.
“군대 3년 갔다오면 손가락이 썩는다”는 속설이 연주자들에게 퍼져 있던 터여서
그는 군입대를 피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으로 몸무게를 48kg 아래로 줄였다.
그렇지만 병무행정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1년뒤 다시’판정이 나왔다. 두번째 신체검사에는 무대책(?)으로 임했다.
뜻밖에 1년짜리 방위 판정이 나왔다.
그 시기는 방위 제도가 막 생겨난 시기여서 ‘웬만하면’ 방위로 빠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조용필 자신은 왜 방위 판정을 받았는지 지금도 모르겠다고 한다.
“그때서야 시골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972년 봄이었으니 가출하고 꼭 3년만이었죠.
어머니에게 인사는 해야겠다 싶어 집에 들렀던 것인데
마침 아버지가 서울에 올라가고 안 계시더군요.
그때도 아버지 얼굴은 못 뵈었죠.
소사(지금 경기도 역곡) 훈련소에 가서 현역병들에게 죽어라 하고 기합같은 3주훈련을
마치고 군생활을 했죠.
마침 제 병무서류가 분실되는 바람에 중간에 붕 떠서 부산으로,
서울로 왔다갔다 하다가 1년을 보냈죠.”
연주자로서 다행이었던 것은 군생활을 하면서도 오후 5시에 ‘퇴근’한 뒤 계속해서
음악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입대전 ‘김트리오’가 해체되는 바람에 용필은 ‘25시’라는 그룹에 들어가 활동했다.
제도권으로 진입할 기회도 가졌다.
처음 노래를 취입한 것이다. 드라마 주제곡이었는데,
부산에서 제법 히트하고 다시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은 노래
‘돌아오지 않는 강’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중적 인기나 명성은 얻지 못하고 ‘습작’기간이 이어졌다.
“제 이름으로 된 그룹을 처음 가지게 됐는데 그게 바로 ‘조용필과 그림자’였습니다.
1973년 말이었을 겁니다.
친구들이 내 그룹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건데 다운타운을 시작으로 1974년부터 조금씩 이름을 얻었어요.
처음에는 부산에서 활동하다 74년에 서울로 올라왔죠.
그리고 그해 봄 서울에 전세 아파트를 얻고 비로소
아버님과 어머님을 집으로 모셔왔죠.
아버지하고는 그때 6년만에 다시 만난 거예요.”
‘조용필과 그림자’로 다운타운을 누비던 시절 취입한 곡이 바로 그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1975년 10월 킹레코드사가 내놓은 이 음반은 조용필 독집은 아니었다.
앞면은 조용필,
뒷면은 당시 인기그룹 영사운드의 노래들로 짜여 있었다.
앞면의 타이틀곡은 ‘너무 짧아요’였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그저 앨범에 섞여 있는 노래였다.
재일동포들의 잇따른 한국 방문과 맞물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부산에서부터
폭발적 인기를 얻었고 삽시간에 국민 애창곡처럼 확산됐다.
자연스럽게 ‘조용필과 그림자’도 유명 그룹이 되고 바빠졌다.
흔한 말처럼 ‘탁 뜬’것이었다.
그러면서 조용필 자신도 무명 시절과는 천지차이인 꿈같은 스타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가지 못했다.
1977년 5월 이른바 대마초 파동이 터졌다.
“1969년에 미군클럽 연주생활을 할 때 미군들이 숙소에 대마초를 갖고 놀러왔을 때
처음 한번,
그리고 나중에 이태원에 있을 때 역시 미군들이 갖고 놀러온 것을 다시 한번 피워봤는데 그게 문제가 됐어요.
처음에 한번 피워보니까 나는 전혀 안 맞더라고요.
팔뚝에 왕방울같은 혹이 여러개 생기고, 토하고,
그래서 관뒀죠.
나중에 이태원에서 다시 한번 해보니까 역시 안 맞아요.
그런데 그때 1969년, 70년만 해도 대마초 같은 것은 규제하는 법도 없을 때거든요.
나는 도저히 안 맞아서 그렇게 한번씩 해보고는 안한 거고.
그게 왜 나중에 문제가 됐는지 알아봤더니, 일단 검사한테 가면 무조건
‘네가 아는 놈 50명을 써라’하는 거예요. 이유가 없어요.
무조건 50명을 채워야 되는 거예요.
저는 은평구에 있던 무슨 병원인가 하는 데 가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풀려났는데
추징금이라고 달랑 250원이 나왔어요.
그런 일이었는데 언론에서는 엄청난 일로 터져나간 겁니다. 뭐 어떡해요.
이제 끝났구나 싶었죠.”
習作과 實戰, 12년을 단련하다
활동금지를 당하는 바람에 그는 무대에 설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난 뒤 그는 노래 제목처럼 부산으로 돌아가
다시 그룹 활동을 재개했다.
1977년 5월부터 대마초가수들에 대한 해금조치가 내려진 79년 12월까지
그는 은둔한 뮤지션으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음악생활을 해나갔다.
이 30개월은 그에게는 암흑기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 시기가 있었기에 오늘의 그가 있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정말 답답했죠. 꽤 오랫동안 연습기를 거쳐 실력도 어느 정도 쌓았고,
또 노래도 빵 떴는데 정작 가수생활을 못하게 됐으니….
솔직히 희망은 없었지만 그래도 노래와 음악공부는 쉴 수 없었어요.”
그동안의 기사 스크랩을 훑어보면 이 시기에 그는 창(唱)을 접하고 판소리를 연습하는 등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목소리를 완전히 트이게 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그것은 좀 과장된 얘기다.
10년 동안의 부단한 연습과 ‘현장실습’을 거치면서
그의 목소리는 이미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1978년에 민요를 처음 접했고 거기서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까지 제 불만이 목소리가 너무 미성(美聲)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서양의 록(rock)에 미성은 안 어울리거든요.
소리가 탁해야 돼요.
왜 그 허스키하다는 말 있잖아요.
될 수 있는 대로 그쪽으로 목소리가 개발돼야 하는데 저는 그런 게 좀 부족했어요.
그래서 판소리 흉내를 좀 많이 내면서 목소리를 다듬어 봤어요.
특히 ‘춘향가’ 중에서 이도령이 서울에서 내려와 구걸하는 장면을 수백번 불렀죠.
그렇지만 창이나 판소리 공부를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또 그때 목소리가 트인 것도 아닙니다.
그전에 음악살롱과 클럽에서 무명 밴드활동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목소리를 거칠게 만들고 또 다듬고 한 결과죠.”
대마초 사건은 그런 점에서 오히려 그에게 득이 됐다.
“그때 ‘돌아와요 부산항에’ 한곡으로 떴으면 아마 한두해 스타로 붕 떴다가
다른 사람들처럼 끝나고 말았을지 몰라요.
그렇지만 30개월 동안 뒤로 물러나 제 자신도 돌아보고 음악 에너지도 속으로
꽉꽉 충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고교 졸업후 1970년대 중반까지 그는 늘 노래를 하고 기타를 연주했다.
음악 속에서 음악만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듯 그에게는 ‘선생님’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
모든 것을 혼자 했다.
지도하는 사람도 감독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스스로 치열하고 피터지게 ‘습작’을 거듭해야 했다.
‘못하면 떨어져나가야 하는’뜨거운 현장, 바로 무대 위에 항상 서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은 그를 힘있는 가창력과 단단한 연주자로 만들어갔다.
그 실력이 1970년대 중반 한차례 빛을 볼 기회가 있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한차례 정상으로 질주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도 일순 좌절됐다. 밖으로 터져나오려던 에너지가 거듭 안으로, 안으로 축적돼 갔던 것이다.
제도권내 음악교육과 동떨어져 혼자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악보를 그리고 작품을
궁리하고 한 것 또한 그에게는 엄청난 재산이 됐다. 그는 기존의 트로트도 아니고
그때 한창 유행하던 포크계열도 아닌,
그렇다고 정확하게 ‘록’이라고만 말할 수도 없는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개척했다.
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노래들 말고 그가 직접 만든 노래들이 갖는 독창성은
바로 그런 혼자만의 습작 과정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천부적 재능은 없었다.
흔히 ‘미8군 무명시절’로만 표현하고 넘겨버리기 일쑤인 그 시기는
오늘의 조용필을 있게 한 습작의 시간이고 에너지의 축적기였다.
12년 동안 무대 위에서 열창하고 연주하고, 또 무대 아래서는 끊임없이 연습하고 하는
동안 그는 소위 ‘노래의 도사’가 돼갔다.
남들은 몇년 동안 한번 내기도 힘든 독집 앨범을 1980년대 내내
매년 한차례씩(어떤 때는 두차례나) 쏟아냈던 것,
또 남들은 1년에 한번 하기도 힘든 라이브 콘서트를 적게는 40회에서 많게는
100회까지 소화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때 오랫동안 쌓았던 파워 덕분이었다.
종이가 단단하게 뭉쳐져 당구공이 되는 것처럼,
안으로 눌리고 쌓인 음악실력과 에너지는 1980년대를 명실공히
조용필의 시대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습작기간’에 쌓인 음악실력과 에너지는 어디까지나 기본 바탕이다.
그것만으로는 역시 대중적 인기를 얻는 데 한계가 있다. 탄탄한 음악성과 실력을 갖춘
많은 가수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중적 인기를 쫓으려다 보면 이번에는 자신의 컬러,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가수들은 갈등한다.
무엇을 좇을 것이냐. 조용필은 어땠을까.
“음악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음악을 하면 됩니다. 음악 자체가 좋고
나쁜 것은 있을 수 없지요.
마찬가지로 가수가 좋아하는 음악 스타일과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 스타일도
다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만의 음악세계도 키워 나가고 또 대중이 원하는 음악도 생산하고 전달할 수
있어야죠.
이 노래는 천박해서 부를 수 없다거나,
또 나는 이런 음악만 추구하기 때문에 저것은 할 수 없다는 태도를 저는 처음
그룹활동을 할 때부터 경계했어요.”
이에 대한 모범 사례로 조용필은 세사람의 뮤지션을 든다.
“프랭크 시내트라는 어떤 쪽으로 노래했습니까?
어떤 장르라고 단정하기 어렵잖아요.
어떤 때는 아주 고상하고 어렵기 짝이 없는 노래를 부르다가도 또 어떤 때는
너무나 대중적이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심지어 탭 댄스까지 했잖아요.
엘비스 프레슬리는 또 어떻습니까. 자기의 음악세계를 고집했습니까.
로큰롤을 축으로 삼으면서 대중이 원하는 노래는 다 소화해 들려줬어요.
소울이면 소울, 록이면 록, 댄스곡이면 댄스곡.
비틀스도 그렇죠?
일반인들이 듣기에 별로 가슴에 와 닿지도 않는 자기 색깔의 음악도 하지만 그러다
갑자기 ‘예스터데이-’하면서 대중의 가슴을 축축하게 적셔줍니다.
진정한 대중음악인의 자세나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죠.”
조용필의 팬층은 두텁기로 정평이 났다.
세대를 넘어 그의 노래는 애창된다.
그것은 조용필 자신이 일찍부터 겨냥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음악생활을 해오는 동안 스스로 장르의 한계를 두지 않았다고 말한다.
“팬은 두텁게 가져가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트로트·록·민요·
소울·발라드 등 모든 장르를 아우른다.
자기만의 음악적 색깔을 지켜나가면서 대중적인 노래도 마다하지 않는 것도
팬들의 다양한 취향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다.
“음악·노래는 정서를 담는 것 말고도 가수가 살아가는 사회상,
또 가수가 살아가는 사회의 역사성까지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순수한 낭만가요 말고도 상징적이고 의식적인 노래들도 많이 만들고 불렀어요. ‘ 서울 서울 서울’이라든가 ‘미지의 세계’ 또는 ‘한강’이나 ‘꿈’‘킬리만자로의 표범’ 같은
노래들이 그런 것이죠.
조용필의 음악은 그 무엇에도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을 추구해온 셈입니다.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겨울의 찻집’도 부르고 ‘서울 서울 서울’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음악활동을 해나가든 그것은 그의 마음대로다.
옳다 그르다를 따질 수 없다. 어쨌든 그런 ‘폭넓은’ 생각으로 만들어낸 노래들이 대부분
크게 히트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대중음악의 전 장르를 끌어안으면서도 ‘조용필의 음악적 컬러’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특징이자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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