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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구자형이 말하는 '창밖의 여자'

필매냐, 2002-10-11 06:15:43

조회 수
2138
추천 수
11
구자형씨는 음반제작자, 가요평론가, 방송작가, 시인이란 이력을 지녔으며 현재는
길은정씨의 매니저로 활동 중입니다.


#####


창밖의 여자



조용필을 실물로 처음 본적이 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조용필이 나타났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웅성거
렸다. 젊은 사람들은 조용필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용필이가 왔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77년이나 78년이었을 것이다. 충무로에 있던 cm사무실 한국 스투디오에서였다. 조용필
은 녹음실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누굴 만나러 온 것 같았다. CF 감독 아니면 한국스투디
오에서 일하던 사월과 오월의 백순진씨? 옛시인의 노래 작곡가 이현섭씨? 바보처럼 살았
군요? 김도향씨? 모두가 한국 스투디오에서 일할 때였다.


조용필은 버버리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 수척해 보였고, 어두웠다.
대마초 연예인 사건으로 인해 활동이 정지 당했을 때였으니까 당연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순간, 그에게서 한국적인 블루스라고 할까, 시장통에서 맡아지는 한국인들의 평범하면서
도 어딘가 찌들은 듯한 서민의 흔적 같은 것들이 훅하고 끼쳐 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녹음실 문을 열고 누군가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갔다.
그로부터 몇년 후 1980년, 조용필은 창밖의 여자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손..
돌아서 눈감으면 강물이어라. 한줄기 바람되어 거리에 서면..


창밖의 여자는 절창이었다.
포크가 지향하던 정신주의 대신, 그는 오장육부로 노래하는 본능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확신이었고, 피울음 같은게 그의 노래 속에 배어 있었다.


한 여자가 창가에 선다..
이것이 창밖의 여자, 첫 풍경이다.
왜 서는가? 그녀는 바라보는 창가에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손을 발견한다.
그대라니? 누구인가? 아마도 옛사랑이었을 것이다.
그 하얀 손, 이별할 때도 자그마하게 흔들렸을 그 손,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
고, 그녀의 메말랐던 손을 잡아주었었던 그 손, 그 손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실제는 아니고 환상처럼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돌아서고 만다.
그 손은 지금 환영처럼 그녀의 마음 속에서만 보일 뿐이다.
결코 다가설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손이다.
그 절망이 그녀를 눈감게 한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상상의 바닷 속으로 깊이 빠져들기 시작한다.
드디어 그 하얀 손의 환상은 강물이 되어 그녀를 범람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다.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듯이 그녀는 거리로 나선다.
그 하얀손이 강물로 찾아 왔듯이, 이제 그녀는 바람이 되어 거리로 나서고 있다.


그대는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무네..


비로소 강물은 강물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하얀 손의 수신호도 그쳐 버리고,
마침내 가로등 되어 그녀의 곁에 머물기 시작한다.
그녀는 오래 기다려 온 것 처럼 그 풍경 속에 머물기 시작한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옳커니, 상처 뿐인 사랑인데, 여전히 실체는 만날 수 없고, 가질 수 없고,
그냥 가로등 불빛으로만 서성거릴 뿐인데, 이게 내 사랑인데,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절대로.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이건 참 묘하다.
해석하기 따라서는 그대의 환상 속으로 서서히 미쳐가고 싶다일 수도 있고, 차라리
나를 영영 깨어날 수 없는 잠의 나라로 떠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협조요청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제 기다림과 그리움 대신 선택한 방황은 즐거운 자유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차디찬 거리의 열기 없는 가로등의 뿌연 불빛일 뿐이다.


창밖의 여자는 매우 짧은 가사를 지니고있다. 뚜렷한 스토리는 없다.
다만 KBS 라디오 드라마였기에 드라마의 기본 줄거리를 이해한다면 좀 더 이 노래
속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배명숙 작사, 조용필 작곡의 창밖의 여자는 드라마 작가 배명숙의 작품이다.
창밖의 여자는 집안에서의 삶을 거두어 내고 외출하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가족관계 안에서만의 자신이 아니라 옛사랑과의 인연 때문에 여전히 그리움을 지병
처럼 앓고 있는 여인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가출일 수도 있고, 자유의 선택일 수도
있다.


그리고 창밖의 여자는 80년대 한국가요계의 문을 열어 젖힌 새로움이었다.
그리고 다분히 격정적이었다. 조용필의 목소리는 이글이글 지글지글 끓며 넘치는
불의 바다였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가슴들을 태워버리고 말 것 같았다.
5공화국이 상당히 겁을 주던 시대, 사람들은 그 불길 속에서 최후의 자존심을 발견한다.
숨죽여, 숨죽여,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고, 죽은 척, 죽은 척, 하라면 하라는대로 하지 않
으면 왠지 좋지않을 것 같은 날들속에서 조용필의 노래는 그시절 정치적 가위눌림의 출
구였었다.


나는 창밖의 여자를 버스 안에서 처음 들었다.
1980년의 봄이었고, 버스 안에는 사람들의 열기가 가득했다.
버스기사가 켜 놓은 라디오에서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들려왔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나는 문득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필은 문득 대한민국을 자신의 목소리로 완벽하게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구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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