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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추억기행 .84] 밴드이야기 <12>
대구 상권 발전축은 동남진했다. 6·25 전쟁 피란기엔 향촌동, 대구역 앞 화전동, 포정동, 대안동, 계산동, 남산동, 북성로, 대신동 등 주로 한일로(국채보상로) 북동서편에 집중됐다. 1969년 12월. 대구 유통사에 한 획을 긋는 대구백화점이 오픈한다. 상권의 축은 곧장 남동쪽으로 기운다. 70년대 들면 대구 유흥계는 점차 백가쟁명 시대로 돌입한다. 요정, 나이트클럽, 다방, 회관, 클럽, 살롱, 카바레, 고고장, 디스코장, 스탠드바, 비어홀, 주점, 음악감상실이 골목 골목 진을 치고 90년대초입까지 전성기를 누린다.
76년쯤 대백 11층 450여평에서 태동한 맥심은 그 명성에 걸맞게 무려 9년6개월간 한 자리에서 대구 유흥계 맏형 역할을 했다. 맥심나이트는 초대형이었다. 테이블 수도 무려 150여개. 웨이터와 보이들만 50명이 넘었다. 음악도 최고로 돌렸다. 트럼펫 주자 박대욱이 이끄는 15인조 풀 캄보밴드가 초창기 음악을 담당했고 78년쯤 존 트라볼타가 '토요일 밤의 열기'로 디스코 붐을 일으키자 맥심도 밴드 스타일을 5인조 그룹사운드형으로 축소시킨다. 바로 '나는 못난이'와 '흰구름 먹구름'으로 유명한 딕 패밀리가 '핫 사운드'란 이름의 밴드로 활동한다.
1979년 맥심나이트 전속 밴드. 중앙이 밴드 마스터 박대욱씨.
맥심은 정통 호텔 나이트클럽보다는 싸고 일반 클럽보다는 조금 비쌌다. 기본은 1만6천원이었다. 밤 9시정도가 되면 더 이상 손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많이 들어오면 800여명. 하루 저녁에 500만원의 매상을 올려 한강 이남에선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유흥업소가 된다. 실내 한 쪽 벽면은 인공폭포로 꾸몄고 천장에는 인조 표주박, 등나무 덩굴을 달았다. 간혹 양주를 시키는 손님도 있었지만 대부분 맥주를 즐겼다. 맥심은 처음엔 크라운을 사용하다가 P사장의 고교 동문이 본사 부사장으로 있어 의리때문에 후반기엔 OB를 사용했다.
맥심 나이트 웨이터부 멤버들.
한 달에 한 차례 빅쇼도 기획했다. 조용필, 패티김, 김추자, 펄시스터즈, 김상희, 김세레나, 이은하, 김연자, 조영남, 윤복희, 이주일, 이덕화 등 웬만한 한국 연예인들은 여길 거쳐갔다. 개런티가 가장 비싼 사람은 조용필이었다. 80년대초 사흘 공연에 300만원쯤 받았다. 조용필은 아무데서나 공연을 하지 않았다. 꼭 부산 코모도호텔 나이트클럽과 맥심나이트만 고집했다. 대구에 오면 늘 동인호텔 전용 숙소만 이용했다. 공연은 보통 오후 8시30분, 10시30분 두 차례. 공연이 끝나면 전속 밴드 '위대한 탄생'과 간단히 단합 술자리를 가진 뒤 막바로 동인호텔 전용룸으로 직행했다. 어떤 때는 조용필이 타고 온 차번호를 알고 있던 일부 오빠부대들한테 들켜 유명세를 치러야만 했다. 심지어 조용필의 차 위에 올라가는 난동을 부리고 자제를 요청하는 조용필의 가슴과 엉덩이를 만지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과도한 경호를 원치 않았다. 모두 자기 팬이기 때문이었다. 조용필은 손님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맥심내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선글라스를 쓰는 등 변장한 채 대백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동인호텔에 묵는다는 정보를 입수한 극성파 오빠부대는 호텔 현관 앞에서 조용필의 히트곡을 합창하며 동이 틀 때까지 진을 쳤다.
조용필이 맥심에서만 공연을 고집한 것은 P사장이 대마초 파동으로 방송 출연이 정지된 조용필이 대구에 내려오면 형편이 어려운 그를 잘 감싸주었기 때문이다. 조용필은 향촌동의 대표적 나이트클럽 판코리아 전속 리더 기타리스트였던 유재학을 대구 공연 중에 알게 된다. 그 인연 덕분에 유재학은 조용필의 매니저가 된다. 조용필의 술 실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소주 5∼6병은 기본이고 아무리 술이 취해도 실수가 없었다. 가끔 오빠 부대를 피하기 위해 맥심 측 관계자와 경주의 한 흐름한 요정을 찾기도 했다.
패티김은 악단과의 호흡을 중시해 꼭 점심 먹고나서 한번 호흡을 맞춰본 뒤 본 공연에 임할 정도로 프로근성이 대단했고 숙소는 한일호텔을 잘 이용했다. 가장 대중적인 기질을 가진 가수는 조영남이었다. 그는 공연을 하다가 신이 나면 기타 연주자의 기타를 뺏어 즉흥 연주를 할 정도이다. 80년대초 그가 공연을 하러 왔을 때도 트레이드마크가 된 국방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공연을 마쳐도 바로 자러 가질 않았다. 쇼핑도 하고 손님들이 원하면 합석할 정도로 소탈했고 숙소도 미리 잡는 걸 싫어했다. 닥치는 대로 놀고, 놀다가 눈에 띄는 곳이 숙소가 됐다.
맥심 첫 초청 가수는 당시 '밤차'로 디스코 붐을 일으키기 시작한 이은하였고, 김추자와 펄시스터즈도 맥심 무대에 섰다. 김추자는 75년 대마초 사건으로 연예협회로부터 제명처분을 받았지만 그녀의 인기는 좀처럼 식지않았다. 김추자의 등장에 펄시스트즈가 가장 긴장했다. 그런 와중에 양측의 포스터가 동시에 대백 게시판에 부착됐다. 펄 공연 뒤 김추자 공연이 이어지게 됐는데 펄은 자기 포스터가 김추자보다 볼품없게 취급된 데 대해 발끈, 대구 공연 거부 소동을 벌여 관계자들이 해명하는데 애를 먹었다.
맥심은 B급 가수는 초청하지 않았다. 최소 10대 가수급만 섭외했다. 서울 가수들의 지방 나들이가 흔치 않았던 그 시절 맥심은 업소라기보다는 공연장이었다. 워낙 많은 손님이 몰려들어 엘리베이터도 제 구실을 못했다. 어떤 날엔 1층부터 11층까지 장사진을 쳤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인근 중부경찰서 경찰까지 동원되기도 했다. 맥심 아래층에 있던 기독교 대구방송국 측은 맥심 음악 소리가 아래층까지 울려 맥심측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유흥가에 주먹이 없을 리 없다. 간혹 대구 인근 깡패들이 맥심에 와서 공짜 술을 먹으려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이들을 구석 자리로 끌고가 다신 거기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순수한 손님들은 최대한 예우해줬다. 간혹 주사가 심한 손님이 웨이터에게 행패를 부려도 업장 분위기를 위해 모르는 척 하고 얻어터지는 게 그때 영업방침이었다.
맥심은 85년 문을 닫고 86년 7월 오픈한 파크호텔 내 카사블랑카 나이트클럽으로 명맥이 이어진다. 현재 맥심 자리에는 전문 식당가가 들어서 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대구 상권 발전축은 동남진했다. 6·25 전쟁 피란기엔 향촌동, 대구역 앞 화전동, 포정동, 대안동, 계산동, 남산동, 북성로, 대신동 등 주로 한일로(국채보상로) 북동서편에 집중됐다. 1969년 12월. 대구 유통사에 한 획을 긋는 대구백화점이 오픈한다. 상권의 축은 곧장 남동쪽으로 기운다. 70년대 들면 대구 유흥계는 점차 백가쟁명 시대로 돌입한다. 요정, 나이트클럽, 다방, 회관, 클럽, 살롱, 카바레, 고고장, 디스코장, 스탠드바, 비어홀, 주점, 음악감상실이 골목 골목 진을 치고 90년대초입까지 전성기를 누린다.
76년쯤 대백 11층 450여평에서 태동한 맥심은 그 명성에 걸맞게 무려 9년6개월간 한 자리에서 대구 유흥계 맏형 역할을 했다. 맥심나이트는 초대형이었다. 테이블 수도 무려 150여개. 웨이터와 보이들만 50명이 넘었다. 음악도 최고로 돌렸다. 트럼펫 주자 박대욱이 이끄는 15인조 풀 캄보밴드가 초창기 음악을 담당했고 78년쯤 존 트라볼타가 '토요일 밤의 열기'로 디스코 붐을 일으키자 맥심도 밴드 스타일을 5인조 그룹사운드형으로 축소시킨다. 바로 '나는 못난이'와 '흰구름 먹구름'으로 유명한 딕 패밀리가 '핫 사운드'란 이름의 밴드로 활동한다.
1979년 맥심나이트 전속 밴드. 중앙이 밴드 마스터 박대욱씨.
맥심은 정통 호텔 나이트클럽보다는 싸고 일반 클럽보다는 조금 비쌌다. 기본은 1만6천원이었다. 밤 9시정도가 되면 더 이상 손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많이 들어오면 800여명. 하루 저녁에 500만원의 매상을 올려 한강 이남에선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유흥업소가 된다. 실내 한 쪽 벽면은 인공폭포로 꾸몄고 천장에는 인조 표주박, 등나무 덩굴을 달았다. 간혹 양주를 시키는 손님도 있었지만 대부분 맥주를 즐겼다. 맥심은 처음엔 크라운을 사용하다가 P사장의 고교 동문이 본사 부사장으로 있어 의리때문에 후반기엔 OB를 사용했다.
맥심 나이트 웨이터부 멤버들.
한 달에 한 차례 빅쇼도 기획했다. 조용필, 패티김, 김추자, 펄시스터즈, 김상희, 김세레나, 이은하, 김연자, 조영남, 윤복희, 이주일, 이덕화 등 웬만한 한국 연예인들은 여길 거쳐갔다. 개런티가 가장 비싼 사람은 조용필이었다. 80년대초 사흘 공연에 300만원쯤 받았다. 조용필은 아무데서나 공연을 하지 않았다. 꼭 부산 코모도호텔 나이트클럽과 맥심나이트만 고집했다. 대구에 오면 늘 동인호텔 전용 숙소만 이용했다. 공연은 보통 오후 8시30분, 10시30분 두 차례. 공연이 끝나면 전속 밴드 '위대한 탄생'과 간단히 단합 술자리를 가진 뒤 막바로 동인호텔 전용룸으로 직행했다. 어떤 때는 조용필이 타고 온 차번호를 알고 있던 일부 오빠부대들한테 들켜 유명세를 치러야만 했다. 심지어 조용필의 차 위에 올라가는 난동을 부리고 자제를 요청하는 조용필의 가슴과 엉덩이를 만지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과도한 경호를 원치 않았다. 모두 자기 팬이기 때문이었다. 조용필은 손님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맥심내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선글라스를 쓰는 등 변장한 채 대백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동인호텔에 묵는다는 정보를 입수한 극성파 오빠부대는 호텔 현관 앞에서 조용필의 히트곡을 합창하며 동이 틀 때까지 진을 쳤다.
조용필이 맥심에서만 공연을 고집한 것은 P사장이 대마초 파동으로 방송 출연이 정지된 조용필이 대구에 내려오면 형편이 어려운 그를 잘 감싸주었기 때문이다. 조용필은 향촌동의 대표적 나이트클럽 판코리아 전속 리더 기타리스트였던 유재학을 대구 공연 중에 알게 된다. 그 인연 덕분에 유재학은 조용필의 매니저가 된다. 조용필의 술 실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소주 5∼6병은 기본이고 아무리 술이 취해도 실수가 없었다. 가끔 오빠 부대를 피하기 위해 맥심 측 관계자와 경주의 한 흐름한 요정을 찾기도 했다.
패티김은 악단과의 호흡을 중시해 꼭 점심 먹고나서 한번 호흡을 맞춰본 뒤 본 공연에 임할 정도로 프로근성이 대단했고 숙소는 한일호텔을 잘 이용했다. 가장 대중적인 기질을 가진 가수는 조영남이었다. 그는 공연을 하다가 신이 나면 기타 연주자의 기타를 뺏어 즉흥 연주를 할 정도이다. 80년대초 그가 공연을 하러 왔을 때도 트레이드마크가 된 국방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공연을 마쳐도 바로 자러 가질 않았다. 쇼핑도 하고 손님들이 원하면 합석할 정도로 소탈했고 숙소도 미리 잡는 걸 싫어했다. 닥치는 대로 놀고, 놀다가 눈에 띄는 곳이 숙소가 됐다.
맥심 첫 초청 가수는 당시 '밤차'로 디스코 붐을 일으키기 시작한 이은하였고, 김추자와 펄시스터즈도 맥심 무대에 섰다. 김추자는 75년 대마초 사건으로 연예협회로부터 제명처분을 받았지만 그녀의 인기는 좀처럼 식지않았다. 김추자의 등장에 펄시스트즈가 가장 긴장했다. 그런 와중에 양측의 포스터가 동시에 대백 게시판에 부착됐다. 펄 공연 뒤 김추자 공연이 이어지게 됐는데 펄은 자기 포스터가 김추자보다 볼품없게 취급된 데 대해 발끈, 대구 공연 거부 소동을 벌여 관계자들이 해명하는데 애를 먹었다.
맥심은 B급 가수는 초청하지 않았다. 최소 10대 가수급만 섭외했다. 서울 가수들의 지방 나들이가 흔치 않았던 그 시절 맥심은 업소라기보다는 공연장이었다. 워낙 많은 손님이 몰려들어 엘리베이터도 제 구실을 못했다. 어떤 날엔 1층부터 11층까지 장사진을 쳤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인근 중부경찰서 경찰까지 동원되기도 했다. 맥심 아래층에 있던 기독교 대구방송국 측은 맥심 음악 소리가 아래층까지 울려 맥심측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유흥가에 주먹이 없을 리 없다. 간혹 대구 인근 깡패들이 맥심에 와서 공짜 술을 먹으려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이들을 구석 자리로 끌고가 다신 거기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순수한 손님들은 최대한 예우해줬다. 간혹 주사가 심한 손님이 웨이터에게 행패를 부려도 업장 분위기를 위해 모르는 척 하고 얻어터지는 게 그때 영업방침이었다.
맥심은 85년 문을 닫고 86년 7월 오픈한 파크호텔 내 카사블랑카 나이트클럽으로 명맥이 이어진다. 현재 맥심 자리에는 전문 식당가가 들어서 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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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황(歌皇), 조용필을 노래하다 이 책을 드리면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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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필사랑♡영미
2004-06-25 01:59:19
♣카 라♣
2004-06-25 02:04:58
맥심이 지금의 대구백화점 11층에 위치...
보통 3일 공연하셨는데요
숙소는 가차이 있는 동인호텔인데
호텔서 백화점까지 거리가 샛길로 해서 채 5분도 안 걸렸었는데
오빠는 보디가드를 주위에 애워싸고 걸어서 백화점으로 가셨어요~~~
그때 따라 다닐때가 생각나에요~~~^^
팬
2004-06-25 03:47:07
서수애
2004-06-25 22:52:57
동인호텔에서 맥심으로 가는 필님 보려고 그때 학생들 동인호텔 앞에 죽치고 있었죠..그 무리속에 저도...
검정양복의 '강한 애들' 속에 폭 파묻혀서 나오던 필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두 손 바지 주머니에 넣으시고 고개는 숙이고..아 옛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