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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필이 부 른 ‘단벌머리’는 녹음실에서 썼고 ‘눈물의 파티’는 녹음실로 가는 차 중에 서 썼다
-박건호(작사가/시인) -
* 가수 조용필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브 몽땅이라는 사람이 말이에요. 죽기 전에 소극장에서 6개월을 공연했어요. 그 사람을 보려면 공연장에 가야 된다는 거죠. 나도 그렇게 까지는 안되더라도 몇 개월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야망이 있다면 그런 거에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세기의 연인 이브몽땅의 고백 -이브 몽땅 저 임자영 엮음
* MBC 어린이 드라마 <호랑이 선생님>에는 조용필을 너무 좋아해서 학업을 소홀히 하고 부모의 속을 썩이는 소녀의 이야기가 다뤄진 적이 있을 정도였다(조용필은 여기에 특별 출연했다)
* 한국 가요계 영웅. 조용필을 아십니까? 청산리 전투를 그린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 엔딩 장면에서 흐르는 조용필의 애절한 노래에 감동 젖었던 기억이 아득합니다.
* 나는 이미 일년 넘게 가불해서 살아가는 소위 가불 인생이어서 생활에 대한 고통이 금새 닥쳐왔다. 곤경을 돌파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새로운 화제, 폭발적인 화제가 동원되는 영화기획이 필요했다.
생각 끝에 당시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슈퍼스타의 위세를 보여주고 있던 가수 조용필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어 일본과 한국에 새로운 화제를 일으켜 보자는 생각을 했다.
조용필 쪽도 찬성이었다. 마침 ‘바람 불어 좋은 날’이 일본에서 자주 상영 방식으로 마니아들의 관심을 끌고 있을 때였다. 일본의 영화인들과 조금씩 교우를 넓혔다.
영화감독 오오시마 나기사, 오가와 신스께, 와카모쯔 고지, 오구리코 헤, 영화평론가 마쓰다 마사오 등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일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가끔 예쁜 여배우가 동행해 주어 한국 영화판을 전혀 모르는 그들은 내가 제법 힘께나 쓰는 영화계의 실세로 착각했다. 그러나 조용필의 시간 내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
또 그를 사로잡기 위한 돈이 나에겐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나는 친구에게 내가 살고 있는 집의 등기부 등본을 억지로 떠맡기고 돈을 빌려 퇴계로에 사무실부터 얻었다. 이장호 워크샵이라고 간판을 걸었다.
어느새 나는 식구를 많이 거느리는 중견 감독이 되어 있었다. 소위 이장호 사단을 관리할 수 있는 아지트가 필요했다. 이리저리 돈에 쫓기고 있으면서도 잔뜩 폼을 잡고 있을 때 구세주처럼 만난 것이 문화영화였다. 16mm 필름으로 새마을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우선 돈이 필요했으므로 나는 기꺼이 승낙했다.
강원도 횡계의 어느 산골 마을에 사는 새마을 지도자의 성공 사례를 영화로 만드는 일이었다. ‘바람불어 좋은날’ ‘어둠의자식들’.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낮은데로 임하소서‘ ’일송정푸른솔은‘ ’바보선언‘ ’과부춤‘ 끝에 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잘살아보세‘ 새마을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영화감독·전주대 교수> - 전북도민일보 2004-04-08
* 연기자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영화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됐을 거예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참 많이 듣고 좋아했거든요.
초등학교 때는 조용필 선배님을 무척 좋아했어요. ‘가요톱10’에서 조용필 선배님이 나와 ‘비련’을 부르면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요. 원래 활달하던 성격도 음악에 빠지면서 내성적으로 바뀌었죠. 그래서 중고등학교 때는 말도 없고 눈에도 잘 띄지 않는 학생이었어요
2004년 11월호 여성동아 - 연예계 복귀한 구본승 단독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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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필사랑♡영미
2004-12-08 02:23:48
저기 있는 비됴 지금 주문하면 살 수 있나요?..
찍사님..잘 보고가요~^^*
弼미주35
2004-12-08 04:3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