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게시판
시간은 무심히 잘도 흘러가고,
어느새 겨울바람 뒹구는 연말이 되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 해를 정리하는 각양각색의 모습들이 곳곳에서 연출될 것이다.
기자에게 한 해를 정리하는 이벤트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우습게도 모든 방송사에서 연예인들에게 잘했다며 베풀어주는 각종 시상식이다.
돌아가며 나눠먹기라느니,
상업주의 잔치판이라느니,
이런 연말 시상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해마다 끊임없이 들려온다.
하지만 트로피를 받아 안고 한껏 흥분된 수상자들의 모습을 TV로 지켜보다 보면,
내 모리속은 여지없이 80년대초 어느 하룻밤의 장면으로 뒤바뀌곤 한다.
한 해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12월 31일 밤,
바가지 머리를 한 꼬마였던 나는 식은땀이 밴 손바닥을 연방 주물러대며
TV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제 곧 10대 가수 중 그해의 최고 가수왕을 발표할 차례인 것이다.
내 가슴은 터질듯이 뛰었고,
희미하게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마 신께 기도까지 올렸던 것 같다.
제발, 제발, 꼭 오빠가 가수왕이 되게 해주세요...
그때 사회자의 저주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해의 최고 가수상, OOO."
이럴수가, 어떻게 이런일이! 우리 조용필 오빠가 가수왕이 되지 못했다니...
저런 실력없는 가수에게 나의 용필이 오빠가 가수왕 자리를 뺏겼다니...
나는 이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한껏 절망하다가 마침내 울음보를 터뜨렸다.
나를 지켜보던 부모님은 혀를 차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가 제 부모 죽은 것도 아니고 기껏 조용필이 상 못받았다는
이유로 집이 떠나가라 통곡한다며 기막혀하셨다.
그랬다.
당시 내게 조용필은 살아 있음의 이유였고,
삶의 유일한 즐거움이었으며,
그에게 좋은 일이 있어야 나 또한 행복할 수 있었다.
그해 12월 31일 밤부터 해가 바뀌는 1월 1일 새벽에 걸쳐,
나는 장장 다섯시간 동안 조용필의 레코드판을 품안에 낀 채 눈두덩이 퉁퉁 붓도록 울어젖혔고,
그를 가수왕으로 인정해주지 않은 세상을 한 껏 미워했다.
3집 앨범에 수록된 '고추잠자리'는 지금 다시 들어봐도 단순한 유행가가 아니다.
그의 밴드 '위대한 탄생'의 탁월한 연주와 테이프 이펙터를 이용한 악기음의 변조는
앞서가는 진보 음악이 대한민국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준 것이었다.
무엇보다 음악을 하겠다면 당장 호적에서 지워버리겠다던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질게 청년기를 보낸 그에게 있어,
'엄마야'라는 단어와 '어지러워'의 표현은 결국 혼돈스런 개인사를 토로하고
있음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4집 앨범에 실린 '생명'은 당시 광주민주항쟁 이후 얼어붙은 사회상에 대한
비감이 담겨있는 명곡이다.
(그 때 이곡은 '기도하는'이라는 가사 뒤에 소녀 팬들의 비명소리로 유명해진 '비련'의
대히트로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시인 김지하가 수감중에 교도소 구멍을 타고 들려오는 이 곡을 듣고,
'과연 어떤 놈이 저런 노래를 불렀을까' 궁금해했다는 뒷이야기도 들은 듯하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노래꾼 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비운의 노래를 시작으로 20여 년에 걸친 음악인생을 살아온
그는, 외국 어느 뮤지션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예인藝人이다.
때로는 '단발머리'처럼 당시의 음악 어법을 넘어선 실험적인 형식으로 듣는 이를
매료시키기도 했고,
'한오백년'처럼 묻혀 있던 우리 민요를 세련되게 끌어 올렸으며,
'남겨진 자의 고독'처럼 그의 절절한 인생사를 대변하는 듯한 노랫말로 눈시울을
적시게도 만드는 그.
철저한 기획에 의해 기계로 찍어내듯 결성되는 댄스 그룹들을 보면서,
혹은 단단한 편견의 껍질 속에 갇혀 자신이 지향하는 장르 이외의 것은 하위문화로
분류하는 왜곡된 청자들을 보면서,
돈이 되는 음악과 돈 안되는 음악이 엄연히 나누어진 요즘의 세태를 보면서,
문득 그 옛날의 '연인' 조용필이 생각나는 건 무슨 까닭일까.
록에서 트로트까지,
청춘에서 중년까지,
모든 세월과 감정을 넘나들어 생각 닿는 대로,
마음 흐르는 대로 목울대를 세우던 그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의 노래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음악을 사랑하게 된 팬 하나가,
지금 자신을 추억하고 있음을 알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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