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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8-09-24] [창간특집] ‘1980년대’ 조용필, 오빠부대를 만들다
2008.09.24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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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조용필
조용필은 1982년 국내를 넘어 국제적인 스타로 도약했다. '못찾겠다 꾀꼬리' '고추잠자리' 등으로 국내 가요계를 석권한 그는 미국 음반사 AMPEX의 골든릴상까지 수상했다. 조용필의 노래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를 누렸다. 70년대 남진·나훈아의 '오빠부대'를 모두 합해도 조용필에 버금가기 힘들 정도였다. '잊혀진 계절'의 이용과 정윤희·장미희·유지인 트로이카가 도전장을 던졌지만 역부족이었다.
●1983년 조용필
조용필이 1983년 발표한 5집 앨범은 한국 가요계에 본격적인 앨범 개념을 확립한 음반이었다. 1~2곡 신곡 외엔 예전 히트곡으로 채워넣던 당시 음반 추세에 종지부를 찍었다. '산유화' '나는 너 좋아' '황진이' 등 장르를 넘나드는 히트곡이 탄생했고 '친구여'는 아직까지도 애창곡으로 불리는 국민가요가 됐다. 영화 '적도의 꽃'의 장미희가 트로이카의 선두주자로 뛰어올랐지만 조용필을 넘을 수 없었다.
●1984년 이주일
이주일은 연예인 중 가장 인정 받지 못하던 코미디언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못생겨서 죄송했던' 이주일은 못생긴 외모로 국민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100분쇼' '텔레비안 나이트' 등 버라이어티 쇼의 선구자가 됐고, 프랑스 문화성 초청 공연까지 펼쳤다. 코미디언 최초로 대통령상까지 수상했다. 1984년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일본 소니 CBS의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하며 한류의 원조로 기록됐다.
●1985년 이선희
이선희는 자그마한 체구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데뷔와 동시에 가요계 여왕으로 떠올랐다. 강변가요제 대상 수상곡 'J에게'로 조용필 1인 천하에 대한 도전에 성공했다. 이후 '아 옛날이여' '갈등' '소녀의 기도' 등으로 1년 내내 각종 차트 1위를 휩쓸었다. 조용필은 전통가요와 록을 접목한 7집 앨범으로 가요계의 혁명을 일으켰다. '미지의 세계' '어제 오늘 그리고' 등이 크게 히트했고, '여행을 떠나요' '사랑하기 때문에'는 불멸의 명곡이 됐다.
●1986년 조용필
80년대 중반 조용필은 30대 중반이었지만 이미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1986년에도 그는 '허공'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등 불멸의 히트곡을 남겼다. 1986년 일간스포츠가 창설한 최고 권위 가요상 골든디스크상 대상도 물론 조용필의 차지였다. 1986년엔 한국적 록을 탄생시킨 들국화가 한국 가요계에 한 획을 그었다. 들국화 역시 조용필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1987년 이덕화
1987년은 MBC TV 드라마 '사랑과 야망'이 국민 드라마로 자리잡은 한해였다. 그 중심엔 야생마 같은 남성미와 카리스마가 돋보인 이덕화가 있었다. 이덕화는 '쇼 2000' 등 버라이어티 쇼에서 "부~탁해요" 등의 유행어를 남기며 전방위 톱스타로 입지를 굳혔다. 강수연은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월드스타로 등극했다. 가요계에선 '사랑이 떠나가면'으로 발라드 전성시대의 문을 연 이문세가 돋보였다.
●1988년 심형래
심형래는 콩트에 국한된 코미디를 대폭 확장시켰다. '영구'라는 바보 이미지로 선보인 슬랩스틱 코미디는 장년층 이상에만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를 신세대에게로 넓혔다. '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 등 코미디 중심의 버라이어티 쇼의 탄생은 심형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988년엔 이미자·하춘화의 뒤를 잇는 트로트 스타 주현미가 등장했다. '신사동 그사람'은 1988년 최고 인기곡이었다.
●1989년 강수연
2년 전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강수연은 이번엔 모스크바영화제까지 휩쓰는 쾌거를 이뤘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삭발 투혼을 발휘한 강수연은 확고부동한 월드스타로 입지를 굳혔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등 국내 영화계에서 보인 활약도 최고였다. 가요계에서는 변진섭이 '홀로 된다는 것'으로 최고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변진섭
변진섭은 감미로운 음색으로 가요계를 장악했다. 1989년 데뷔 앨범으로 최고 스타로 떠오른 변진섭은 1990년 2집 앨범 '너에게로 또다시'로 최고 자리를 굳혔다. '희망사항' '로라' '숙녀'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등 수록곡 모두가 큰 인기를 모았다. 영화계에서 '장군의 아들'의 박상민이 샛별로 떠올랐다. '서편제'는 최초로 서울 관객 100만명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 흥행기록을 새로 썼다.
●1991년 김현식
김현식의 죽음은 역대 가요계의 가장 안타까운 비보였다. 김현식의 유작이 된 '내 사랑 내 곁에'는 김현식에 대한 애도와 함께 1991년 가장 많이 불린 노래가 됐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노래와 마지막까지 함께 한 김현식의 음악 사랑은 진한 감동으로 팬들에게 남아있다. 신승훈·이승환·이승철 등 라이브 콘서트에 능한 가수들도 1991년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1992년 최재성
1992년엔 국민 드라마가 너무 많이 나온 한 해였다. MBC TV 최재성·채시라의 '여명의 눈동자', 최민수·하희라의 '사랑이 뭐길래', 최수종·최진실의 '질투' 등이 1년 내내 시청자들을 안방극장에 붙잡아 뒀다. 최재성과 최민수가 최고 자리를 놓고 경합할만 했지만, 드라마사에 남은 걸작 '여명의 눈동자'에서 혼신의 연기를 펼친 최재성에게 무게가 실렸다. 1992년엔 이주일이 코미디언 최초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와 아이들은 가요계를 넘어 문화계 및 사회에까지 영향력을 미친 혁명적인 뮤지션이었다. 1992년 '난 알아요'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3년 '하여가'로 한국 최고 화제 인물이 됐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모든 게 신세대의 유행이 될 정도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중문화의 중심 소비계층이 신세대로 이동한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1994년 심은하
혜성처럼 등장해 최고 스타로 떠올랐다. 심은하는 1994년 2월 MBC TV '마지막 승부'에서 청순가련형 미녀 다슬이로 등장해 인기를 누린 뒤, 6개월 뒤 MBC TV 'M'에서 소름끼치는 악녀 연기로 안방극장을 휘어 잡았다. 데뷔한 해에 2편의 초대박 히트작을 낸 연기자는 아직도 심은하밖에 없다. '마지막 승부'에서 호흡을 맞춘 장동건과 안성기·박중훈 주연의 영화 '투캅스'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동현 기자 [kulkuri7@joongang.co.kr]
출처:http://isplus.joins.com/enter/star/200809/24/200809241242214736020100000201040002010401.html?click=ispl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