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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무대는 내 운명 … 라이벌 의식한 적 없다 [중앙일보] 조용필 40년, 울고 웃던 40년
애창곡은 아내가 좋아했던 ‘떠나가는 배’



중앙일보 필진과 특별한 만남 9시간

  
‘영원한 오빠’ 조용필을 만나 즐거워하고 있는 문화계 인사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송기철, 윤성아, 신승훈, 이재무, 하성란, 조용필, 주철환, 임진모씨. [사진=김상선 기자]

관련핫이슈조용필40년 울고 웃던40년[2008 Section] me그에게 무엇을 묻는다는 것은 일면 부질없다. 그는 노래 하나로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보여주었다. 별도의 설명은 군더더기다. 노래가 있기에 그는 존재했고, 그가 있기에 우리는 즐거워했다. ‘가왕’(歌王) 조용필(58)이다. 그가 데뷔 40년을 맞았다. 20대 새내기 직장인도, 70대 허리 굽은 촌로(村老)도 그를 안다. 아니,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

그래도 궁금했다. 노래인생 ‘불혹(不惑)’을 떠받쳐온 힘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특별한 만남을 준비했다. 그의 열혈 팬들을 한데 불러 조용필 ‘다면평가’를 시도했다. 중앙일보 신년특집 ‘조용필 40년, 울고 웃던 40년’에 참여했던 필자 10명을 초청했다(3명은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나름 ‘조용필학’에 정통한 고수들이다. 문인·평론가·광고인·방송사 대표 등등. 조용필이 아끼는 후배 가수 신승훈도 합류했다. ‘가왕’은 그룹 인터뷰에 선뜻 응했다. 그의 오늘을 있게 한 팬들에게 감사해했다. 음악이면 음악, 개인사면 개인사, 즉문즉답이 펼쳐졌다. ‘가왕 40년’을 축하하는 아름다운 자리였다.

8일 오후 5시 서울 반포동 팔레스 호텔의 한 연회장. 음악평론가 송기철이 조용필 1집 음반을 가방에서 꺼냈다. 보물처럼 간직해 온 음반이라고 했다. 조용필이 음반에 사인해주자,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이 농을 던졌다. “저 음반, 경매 사이트에 올리려는 거 아냐?”

웃음이 터졌다. 시인 이재무, 소설가 하성란, 광고인 윤성아는 ‘영원한 우상이자 오빠’를 직접 만나 가슴이 설렌다고 했다.

-신문에 실린 ‘베스트 10’이 마음에 들었나. (음악평론가 임진모)

“큰 불만은 없었다. ‘허공’이 빠진 건 아쉬웠다(※‘허공’은 조용필의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다). 그 밖에도 ‘이 노래가 왜 빠졌나’ 하는 반응이 많았다. 어쩔 수 없다. 콘서트에서도 관객들이 원하는 노래를 다 부르려면, 밤을 새야 한다. ”

-노래방 애창곡이 있나. 가장 낮은 점수는. (이재무)

“가곡 ‘떠나가는 배’다. 내 노래 중에서는 ‘꿈’을 자주 부른다. 58점이 나온 적도 있다.” (웃음)

  
데뷔 40주년을 맞은 조용필이 서울 역삼동 개인연습실에서 곡 작업을 하고 있다. 안경에 비친 키보드가 그가 걸어온 길을 말해주는 듯 하다. [사진=김태성 기자]

-노래 40년이다. 음악이 싫어졌던 적은 없었나. (하성란)

“노래는 내 운명이다. 물론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곡이 잘 안 나올 때다. 곡은 억지로 하면 잘 안 된다. 악상, 스타일이 떠오르면 바로 옮겨야 한다. 떠오른 악상을 일필휘지처럼 쓴 곡이 히트한다. 일례로 ‘꿈’은 비행기 안에서 만든 것이다.”

-신승훈에게 묻겠다. 후배가 아니라 동년배 가수였다면, 조용필을 인정했을까. (주철환)

“조용필 선배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이것도 팝송 개사한 거구나 생각했다. 그만큼 용필 선배는 당시 다른 가수들이 할 수 없었던 음악을 했다. 만약 내가 경쟁자였다면, 선배에게 자극 받아 음악의 폭을 넓히려 했을 것 같다. ” (신승훈)

-80년대 이용·전영록·윤수일 등이 인기를 끌었는데, 자신을 위협할 만한 가수로 느낀 적이 있나. (임진모)

“그들은 나와 스타일, 톤이 전혀 다르다.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그리고 다 후배들이다. 그때는 밴드 ‘위대한 탄생’을 통해 새로운 음악을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존 음악과 다른 톤·스타일, 표현을 보여주려고 했다. ”

-개인적으로 7집에 실린 유재하의 곡 ‘사랑하기 때문에’를 좋아한다. 얽힌 사연은 없나. (송기철)

“그때 유재하는 세 번째 건반을 맡았다. 퍼스트 건반 김광민에게 피아노 잘 치는 친구를 구해오라고 했더니 유재하를 데려왔다. 곡을 만들고 싶다고 하기에, 써오라고 했다. 그래서 가져온 게 ‘사랑하기 때문에’다. 느낌이 좋았다.” (※‘위대한 탄생’에서 활동했던 싱어송라이터 유재하는 1987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25살 때였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자신이 엘비스인 게 지겨웠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풀어주려 매니저가 무엇이든 때려부수는 방을 만들어줬다 한다. 인간 조용필은 어떤가. (임진모)

“ 어디를 가도 사람이 모여들었다. 뒷모습만 봐도 조용필을 알던 때였다. 처음에는 여기저기서 술도 마시고, 포장마차에서 우동도 먹곤 했다. 그러다가 절제하자고 결심했다. 실수하는 모습이나 취한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자제하며 살다 보니 생활이 됐다. 차를 타고 가다 저것 먹고 싶다는 느낌조차 없다. 퇴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집에서 거의 모든 걸 해결한다.”

-후배들은 술 하면 조용필 선배를 떠올린다. (신승훈)

“가끔 마실 때도 있다. 하지만 공연을 앞두고는 절대 입에 대지 않는다. 철칙이다. 술에 대한 소문이 점점 부풀려지는 것 같다. 소문이 처음에 양주잔 크기였다면, 지금은 맥주잔, 아니 사발이 됐다. 소문대로라면 난 인간도 아니다.” (웃음)

-선배가 뭔가 센 것(히트곡)을 다시 터뜨려줬으면 좋겠다. (신승훈)

“방송에 안 나가니까 다시 히트곡이 나오기 힘들다. 92년 말 방송활동 중단을 선언한 것은 히트곡을 더 내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 한계를 인정했다. 마흔 넘어서 10, 20대를 끌어안으려 하는 것은 욕심이라고. 상황을 파악하고 욕심을 접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는 절제다. 그래서 무대로 가자고 결심했다. 후회한 적은 없다. 나는 기타리스트에서 출발해 가수가 됐다. 무대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직도 수만 명의 관객을 모으는 그룹 롤링스톤스와 유투를 보며, 나도 저렇게 돼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한다. 유투·롤링스톤스·마돈나가 TV에 나오는 것 봤나. 앨범은 계속 낼 것이다. 19집 앨범을 올해 내놓으려고 반쯤 진행하다가, 건강 문제 때문에 늦어지게 됐다. 내년에 미래 지향적 스타일의 앨범을 낼 것이다.”

-기타리스트에서 보컬로 변신한 게 운명적인 것 같다. (송기철)

“미8군에서 밴드활동을 할 때 보컬 겸 베이스 기타리스트가 입대하는 바람에 내가 노래를 하게 됐다. 대역이었다. 그 전에는 기타를 치며 코러스를 했다. 그런 계기가 없었더라도 노래는 불렀을 것이다. ”

-시대보다 한 보 또는 반 보 앞선 음악을 해왔다. (윤성아)

“늘 새로운 음악을 들었다. 유행하는 서구 음악을 무지하게 많이 들었다. 주로 백판으로 말이다. 미군클럽 주크박스에 들어있는 곡은 다 알았다. 클럽에 일찍 가서 주크박스에 동전 넣고 음악을 들었다. 지금 어떤 음악이 유행한다는 것을 항상 알았다. 그리고 그 판을 사서 계속 들었다. 외국 뮤지션들의 음악을 듣고, 노래한 것은 큰 경험이었다. 지금도 AFN(미군 방송)만 듣는다. 세계음악의 최신 경향을 놓치면 내 길도 잃어버린다. 음악이란 것은 장르 불문하고, 다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팬 층이 넓어졌다.”

-도전에는 두려움이 따른다.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했나. (윤성아)

“연습밖에 없다. 한창 때 1년에 한번 앨범 내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히트곡을 내야 하니까 부담도 컸다. 그런 것을 극복하려면 열심히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노래는 잠시도 쉬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아무리 늦어도 공연 한 달 전에는 연습에 들어간다. 해봐서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외로움도 컸겠다. (하성란)

“외로움조차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 외로움을 즐기는 건 아니지만 아직 견딜 만하다. 외로움이 습관이 돼서 잘 느끼지 못한다.”

  
조용필의 노래 인생을 한눈에 보여주는 정규 앨범 18장의 재킷. 맨 윗줄 왼쪽부터 1~6집, 둘째 줄 7~12집, 셋째 줄 13~18집. [YPC 프로덕션 제공]

-라이벌로 생각한 가수가 정말 없었나. (하성란)

“진정, 그렇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만 생각하며 노래했다.”

-노래에 자기 생애를 담는 것은 아닌가. (이재무)

“되도록 피하려고 했다. 내 삶을 곡으로 만드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몇 년 후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노래를 만들어도 그것은 결국 대중의 것이다. 대중의 마음이다. ”

-대중은 어떤 사람인가. (하성란)

“모든 사람이다. 그들의 마음을 노래한다는 것이다. 장르와 표현방식만 다를 뿐이다. 40주년 공연 타이틀이 ‘더 히스토리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자연과 인간의 삶의 공통점을 말하는 것이다. 관객이 보면서 ‘저게 바로 내 노래야’ 라고 느끼게 하고 싶다.”

-최고의 자리에 올랐는데, 운이 얼마나 작용했다고 생각하나. (윤성아)

“인기를 의식하지 않고 활동해왔다. 내가 어떻게 노래할 때, 무엇을 노래할 때 관객이 좋아하더라, 이런 것만 생각했다. 음악인은 정말 음악 하나만 할 수밖에 없다. 운이 따랐다는 데 동감한다. 지금 이 시대에 조용필이 나왔다면 과연 성공했을까. 적시에, 적소에 나와서, 내 노래가 히트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늘 한다. ”

-1990년대 초 선배와 함께 ‘열린음악회’ 첫 회에 출연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선배가 여의도 수제비 집에서 해줬던 말을 잊지 못한다. 선배가 “넌 라이벌이 누구냐”고 묻기에, 당시 나와 트로이카였던 심신·윤상이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선배는 “넌 라이벌을 나라고 생각할 수 없느냐”며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냥 그렇게 가라”고 했다. 그 말이 큰 자극이 됐다. ‘보이지 않는 사랑’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신승훈)

“하하하, 그랬었지. 별걸 다 기억하고 있다.”

-83년생 신입사원도 노래방에서 ‘친구여’를 부르더라. 조용필의 노래가 ‘클래식’이 된 것이다. 조용필은 통속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 생명력을 가졌다고 본다. 자기관리 능력 때문이다. 40주년을 맞은 소감은. (주철환)

“나는 현재진행형이다. 사실 음악을 평생 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다. 대중의 힘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 같다. 관객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관객이 안 오면 접어야 한다. 버림받는다는 얘기다. 진행형이기 때문에, 40주년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50년을 맞은 패티 김에 비하면 아직 어린애다”

-공연장에서 ‘조용필은 나의 인생이다’라는 팬의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송기철)

“솔직히 기분이 좋다. 사실 나는 팬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초등학생 때부터 팬이었다고 치면, 근 30년이 지났는데…. 2003년, 2005년 잠실 주경기장 공연 때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데도 관객들이 자리를 뜨지 않았다. 고마운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평생 못 잊을 순간이었다.”

-조용필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웃음) 조용필은 노래로 자신을 표현하는 가객이다. 인근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기자. (주철환)

노래방에서도 얘기는 계속됐다.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소설가 하성란은 “조용필과 노래방에 온 게 비현실적인 현실”이라고 표현했다. 먼저 마이크를 잡은 이는 주철환 대표였다. 그는 자신이 노랫말을 붙인 ‘도시의 오페라’를 불렀다.

다음은 신승훈의 차례. “19년 가수 생활 중 가장 떨리는 순간”이라며 ‘창 밖의 여자’를 불렀다. 조용필 35주년 콘서트 때 게스트로 무대에 올라 불렀던 곡이다. 가왕이 후배를 격려했다. “승훈이 너니까, ‘창밖의 여자’를 시킨 거야. 이 어려운 노래를 너 말고 누가 부르겠니.”

이어 하성란이 ‘그 겨울의 찻집’을 불렀다.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지그시 눈을 감고, 노래를 듣던 조용필이 말했다.

  

“외국에서는 부모와 자식이 손잡고 공연장에 온다. 나도 그런 관객들을 보면 뿌듯하다. 승훈이도 ‘그 겨울의 찻집’ 같은 노래를 해야 노래의 폭이 넓어진다. 그래야 공연을 할 수 있다. 좋은 노래는 장르에 상관없이 다 훌륭하다. 비틀스의 명곡 ‘예스터데이’는 세상에 나왔을 때 우리로 치면, 트로트 같은 노래였다. 좋은 노래는 세월이 갈수록 힘이 세진다.”

신승훈이 ‘비련’에 얽힌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재작년 1월 조용필이 후배 가수 50여 명과 친목의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조용필이 ‘비련’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기도하는~’ 다음에 후배들이 ‘꺅!’하고 예의 함성을 질렀더니, 그가 갑자기 마이크를 놓고 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다들 물었다. “도대체 왜 그랬어요?” 조용필 답. “가끔씩 그래요. 쑥스러워서…. 허허허.”

조용필은 애창곡 ‘떠나가는 배’를 골랐다. “우리 와이프(2003년 사별한 부인 안진현씨)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했다. ‘좋아했던’이 아닌 ‘좋아하는’이었다. 고인은 아직도 그의 마음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로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조용필의 절창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어딘가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조용필은 그간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지인을 만날 때 집(서초구 방배동) 근처 소박한 횟집에 주로 가는데, 먼저 간 부인이 투병할 때부터 생긴 습관이라고 했다.

“아내가 갑자기 아플 때 바로 집에 들어갈 수 있도록 100m 이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화가 오면 바로 튀어 들어가야 하니까. 지방 공연 때도 함께 다녔다. 아내와 10년 살면서 많이 의지했다. 남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아내다. 여자는 남자를 완성시키는 존재다.”

노래가 계속됐다. 누가 어떤 노래를, 또 몇 곡을 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부르든 조용필의 노래는 자연스레 합창이 됐다. 그들은 밤 깊도록 조용필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마지막 곡으로 조용필과 신승훈이 ‘사랑하기 때문에’를 불렀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노래를 마친 신승훈이 말했다. “가수를 시작할 때 어머니께서 그러셨어요. 조용필처럼 가슴에서 나오는 노래를 하라고. 아직도 그 말씀을 하세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가왕의 40주년 공연은 그렇게 무르익고 있었다.  
글=정현목 기자, 사진=김상선·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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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 24일 올 첫 콘서트

다음달 24일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시작되는 조용필 40주년 콘서트는 규모부터 웅장하다. 폭 90m, 높이 40m, 국내 최대 규모다. 40m 높이의 타워 두 개는 조용필 자신과, 40년을 함께해온 팬을 상징한다. 무대 뒷면과 좌우에는 초대형 LEC 영상판을 설치, 다양하고 생생한 영상을 보여준다. 중앙 무대 바깥 쪽에도 25m 높이의 보조 타워 두 개가 세워진다.

조용필은 지난 세월을 6개 주제로 나눠, 히트곡 40곡을 들려준다. ‘그리운 날들’ ‘추억의 날들’ ‘도전의 날들’ ‘나눔의 날들’ ‘나의 날들’ ‘동행’이다. 이번 투어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뉴욕을 포함해 총 24개 도시에서 연말까지 진행된다. <일정 표 참조> 스태프도 엄청나다. 무대 인원 1200명을 포함해 총 5200명이 투입된다. 무대 디자인은 박동우씨가, 연출은 이종일씨가 맡았다. 1544-1555. 

중앙일보 선정 조용필 노래 베스트 10
※곡명(발표 시기) 중앙일보 연재일, 필자

①꿈(1991년), 1월 1일, 시인 이재무
②그 겨울의 찻집(1985년), 1월 8일, 소설가 하성란
③단발머리(1980년), 1월 15일, 음악평론가 송기철
④고추잠자리(1981년), 1월 22일, 가수 신승훈
⑤ 창밖의 여자(1980년), 1월 29일, 음악평론가 임진모
⑥ 못 찾겠다 꾀꼬리(1982년), 2월 5일, 문화평론가 김종휘
⑦ 비련(1982년), 2월 12일,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
⑧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년), 2월 19일, 대중음악연구가 이영미
⑨ 킬리만자로의 표범(1985년), 2월 26일, 시인 이문재
⑩ 친구여(1983년), 3월 4일, 윤성아 TBWA코리아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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