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한국일보 2008-07-15]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17>조용필 이야기
2008.07.15 20:14
신문사 | |
---|---|
기사 날짜 |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17>조용필 이야기
대마초 사건으로 실의 빠진 조용필 재기 엿봐
"내 동생" 뉴욕서 식당하던 누나와 뜻밖 인연
카네기홀 공연 성사 시키려 발벗고 나서기도

조용필이 얼마 전 기자회견에서 “제발 나를 국민 가수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그렇다. 옳은 말이다. 국민 가수라는 말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용필 뿐만이 아니라 다른 가수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나아가서 국민 배우니 국민 여동생이니 하는 말들을 쓰지 않아야 한다. 이러다간 국민 아버지, 국민 어머니, 국민 아저씨, 국민 아줌마, 국민 누나 등등 마구마구 나오게 될 판이다. 국민 가수라고 불리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는 조용필의 판단은 옳았다.
그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노래도 잘 하고 가수로서 또는 스타로서 품위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인기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조용필이라는 스타가 탄생할 때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본인은 알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적지만 내 도움도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가수가 데뷔할 때 아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 하지만 조용필이 가수 생활을 시작할 무렵, 즉 지금부터 30년, 40년 전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원더걸스라든가, 소녀시대 같은 화려한 데뷔는 꿈도 꾸지 못할 시절이다.
1968년에 만 18살의 조용필이 조용히 데뷔를 한다. 미군 부대에서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그룹사운드의 한 멤버가 된 그는 모든 그룹들이 다 그렇듯이 비틀스의 음악을 모델로 삼다가 자기 것을 만들어 가기 시작 할 무렵 충격적인 대마초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조용필은 대마초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때는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절이었고, 또 어쩌면 그 사건이 전화위복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는 새로운 인생 설계를 하게 된다. 서울 명동 2가 사보이 호텔 뒤편 골목길에 있는 별로 크지 않은 규모의 클럽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75년, 나는 미국 뉴욕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자주 가던 선지 해장국집이 맨해튼에 있었다. 식당이름이 인천집이었다. 어느 날 이 식당 주인 남자가 나한테 “신문기자시니까, 혹시 조용필이라는 가수를 아십니까?”하고 물어 왔다. “조용필이요? 알지오. 내가 기사도 썼는데요?” 내가 조용필이란 가수를 안다고 하니까, 이번엔 안 주인까지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안 주인이 조용필의 친 누나라는 것이다. “가수를 그만 두라고 그렇게 야단을 치는데도 말을 안 들으니 어쩌면 좋아요?” 조용필 누나의 말이다. “대마초인지 뭔지 피우다가 잡혀 들어가지를 않나, 비싼 기타를 산다고 돈 때문에 고생을 하지 않나. 속상해 죽겠어요.”
더구나 며칠 전에는 편지를 보내 왔는데 미국에서 전자 오르간 좋은 것으로 하나 사서 보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알아보니까 값이 굉장히 비싸던데 이거 사서 보내 줘야 할까요? 가수로서 크게 된다는 보장이 있으면 사서 보내 줄 텐데, 지금으로 봐서는 영, 아닌 것 같으니 말입니다.” 조용필 매형의 말이다.
나는 그들에게 두 말 없이 사서 보내 주라고 했다. “나중에 유명한 가수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가수 되기를 포기 하지 않는 한 악기는 좋은 것을 가져야 하니까, 보내 주구려. 더구나 누나 매형이 이 고생하면서 번 돈으로 사서 보냈다는 것을 알면 더욱 열심히 노력 할겝니다.”
얼마 후에 전자 건반악기 한대가 한국으로 보내졌다. 조용필에게는 이 악기가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몇 달 후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발표 되었고, 조용필이란 이름이 만 천하에 알려 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일본 사람들도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일본에 진출을 한다. 일본에는 영화배우 최지희가 요식사업으로 크게 성공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조용필의 일본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이를테면 스폰서 역할을 한 셈이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또 엉뚱한 일을 기획했다. 그 당시만 해도 세계 최고의 공연장인 “카네기 홀” 무대에 조용필을 세워 보자는 기획이다. 그의 인기가 한참 올라가고 있을 때 카네기 홀 공연이 그에게는 큰 홍보도 되고 뉴욕에 사는 교포들에게 큰 위문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우선 장소 섭외를 하고 날짜를 잡아야 한다. 맨해튼 57번가에 자리잡고 있는 카네기 홀은 1891년에 개관을 했다. 처음에는 그냥 “뮤직 홀”이라고 불리웠는데 1898년에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가 이 건물에 큰 돈을 희사하면서 이름을 “카네기 홀”이라고 붙였다. 흔히 볼 수 있는 신식으로 된 멋쟁이 건물이 아니라 얼핏 보기에는 우중충한 낡은 빌딩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영광이다. 오직 클래식 음악에게만 대관을 할 뿐 대중음악에게는 문을 열지 않다가, 비틀즈가 공연을 했다. 비틀즈 공연 때에는 맨해튼 중심의 교통이 완전히 마비가 되었다.
2,000석 쯤 되는 메인 홀이 있고, 그 옆에 300석 규모의 리사이틀 홀이 있다. 나는 작은 홀이 아닌 메인 홀을 대관하기로 마음먹고 대관 책임자를 찾아 갔다. 한국의 클래식 가수라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고, 대중가수인데 한국에서 무지무지하게 인기가 있는 가수이니 메인 콘서트 홀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빌려 달라고 했더니 더 이상 말을 들을 생각도 않고 거절을 당했다.
이쯤에서 대충 물러설 내가 아니다. 자료를 만들었다. 우선 뉴욕에 살고 있는 교포들의 숫자와 그들의 문화 수준이 아주 높다는 점, 그리고 한국의 노래는 한이 들어 있어서 카네기 홀의 명성에 흠을 내지 않을 것이니 재고를 해 달라는 내용의 문서를 만들었다. 조용필의 프로필과 연주 경력 등도 빠뜨리지 않았다. 물론 대마초 사건은 제외했다.
<조용필 이야기 다음 주에 계속>
출처: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07/h2008071503210084800.htm
대마초 사건으로 실의 빠진 조용필 재기 엿봐
"내 동생" 뉴욕서 식당하던 누나와 뜻밖 인연
카네기홀 공연 성사 시키려 발벗고 나서기도

조용필이 얼마 전 기자회견에서 “제발 나를 국민 가수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그렇다. 옳은 말이다. 국민 가수라는 말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용필 뿐만이 아니라 다른 가수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나아가서 국민 배우니 국민 여동생이니 하는 말들을 쓰지 않아야 한다. 이러다간 국민 아버지, 국민 어머니, 국민 아저씨, 국민 아줌마, 국민 누나 등등 마구마구 나오게 될 판이다. 국민 가수라고 불리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는 조용필의 판단은 옳았다.
그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노래도 잘 하고 가수로서 또는 스타로서 품위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인기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조용필이라는 스타가 탄생할 때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본인은 알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적지만 내 도움도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가수가 데뷔할 때 아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 하지만 조용필이 가수 생활을 시작할 무렵, 즉 지금부터 30년, 40년 전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원더걸스라든가, 소녀시대 같은 화려한 데뷔는 꿈도 꾸지 못할 시절이다.
1968년에 만 18살의 조용필이 조용히 데뷔를 한다. 미군 부대에서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그룹사운드의 한 멤버가 된 그는 모든 그룹들이 다 그렇듯이 비틀스의 음악을 모델로 삼다가 자기 것을 만들어 가기 시작 할 무렵 충격적인 대마초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조용필은 대마초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때는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절이었고, 또 어쩌면 그 사건이 전화위복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는 새로운 인생 설계를 하게 된다. 서울 명동 2가 사보이 호텔 뒤편 골목길에 있는 별로 크지 않은 규모의 클럽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75년, 나는 미국 뉴욕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자주 가던 선지 해장국집이 맨해튼에 있었다. 식당이름이 인천집이었다. 어느 날 이 식당 주인 남자가 나한테 “신문기자시니까, 혹시 조용필이라는 가수를 아십니까?”하고 물어 왔다. “조용필이요? 알지오. 내가 기사도 썼는데요?” 내가 조용필이란 가수를 안다고 하니까, 이번엔 안 주인까지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안 주인이 조용필의 친 누나라는 것이다. “가수를 그만 두라고 그렇게 야단을 치는데도 말을 안 들으니 어쩌면 좋아요?” 조용필 누나의 말이다. “대마초인지 뭔지 피우다가 잡혀 들어가지를 않나, 비싼 기타를 산다고 돈 때문에 고생을 하지 않나. 속상해 죽겠어요.”
더구나 며칠 전에는 편지를 보내 왔는데 미국에서 전자 오르간 좋은 것으로 하나 사서 보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알아보니까 값이 굉장히 비싸던데 이거 사서 보내 줘야 할까요? 가수로서 크게 된다는 보장이 있으면 사서 보내 줄 텐데, 지금으로 봐서는 영, 아닌 것 같으니 말입니다.” 조용필 매형의 말이다.
나는 그들에게 두 말 없이 사서 보내 주라고 했다. “나중에 유명한 가수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가수 되기를 포기 하지 않는 한 악기는 좋은 것을 가져야 하니까, 보내 주구려. 더구나 누나 매형이 이 고생하면서 번 돈으로 사서 보냈다는 것을 알면 더욱 열심히 노력 할겝니다.”
얼마 후에 전자 건반악기 한대가 한국으로 보내졌다. 조용필에게는 이 악기가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몇 달 후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발표 되었고, 조용필이란 이름이 만 천하에 알려 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일본 사람들도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일본에 진출을 한다. 일본에는 영화배우 최지희가 요식사업으로 크게 성공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조용필의 일본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이를테면 스폰서 역할을 한 셈이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또 엉뚱한 일을 기획했다. 그 당시만 해도 세계 최고의 공연장인 “카네기 홀” 무대에 조용필을 세워 보자는 기획이다. 그의 인기가 한참 올라가고 있을 때 카네기 홀 공연이 그에게는 큰 홍보도 되고 뉴욕에 사는 교포들에게 큰 위문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우선 장소 섭외를 하고 날짜를 잡아야 한다. 맨해튼 57번가에 자리잡고 있는 카네기 홀은 1891년에 개관을 했다. 처음에는 그냥 “뮤직 홀”이라고 불리웠는데 1898년에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가 이 건물에 큰 돈을 희사하면서 이름을 “카네기 홀”이라고 붙였다. 흔히 볼 수 있는 신식으로 된 멋쟁이 건물이 아니라 얼핏 보기에는 우중충한 낡은 빌딩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영광이다. 오직 클래식 음악에게만 대관을 할 뿐 대중음악에게는 문을 열지 않다가, 비틀즈가 공연을 했다. 비틀즈 공연 때에는 맨해튼 중심의 교통이 완전히 마비가 되었다.
2,000석 쯤 되는 메인 홀이 있고, 그 옆에 300석 규모의 리사이틀 홀이 있다. 나는 작은 홀이 아닌 메인 홀을 대관하기로 마음먹고 대관 책임자를 찾아 갔다. 한국의 클래식 가수라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고, 대중가수인데 한국에서 무지무지하게 인기가 있는 가수이니 메인 콘서트 홀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빌려 달라고 했더니 더 이상 말을 들을 생각도 않고 거절을 당했다.
이쯤에서 대충 물러설 내가 아니다. 자료를 만들었다. 우선 뉴욕에 살고 있는 교포들의 숫자와 그들의 문화 수준이 아주 높다는 점, 그리고 한국의 노래는 한이 들어 있어서 카네기 홀의 명성에 흠을 내지 않을 것이니 재고를 해 달라는 내용의 문서를 만들었다. 조용필의 프로필과 연주 경력 등도 빠뜨리지 않았다. 물론 대마초 사건은 제외했다.
<조용필 이야기 다음 주에 계속>
출처: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07/h200807150321008480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