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팬클럽 미지의 세계 Cho Yongpil Fanclub Mizi

뉴스

신문사  
기사 날짜  
조용필 나의 노래 40년 스페셜 인터뷰
빅스타 릴레이 인터뷰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듯 ‘노래인생 20년,’ ‘연기인생 30년’따위의 표현도 역시 숫자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가왕 조용필의 40년은 다르다고 사람들은 인정한다. 우리가 그를 더 특별하게 보는 이유를 그에게 직접 묻고 싶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소탈한 인터뷰가 필요한 때, 그가 평소 말을 아끼지 않는 절친한 기자 한현우와 마주 앉았다. - 편집자 주
데뷔 40주년을 맞은 조용필(58)과 인터뷰 약속을 한 날짜가 다가오는데, 무엇을 물어야 할지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궁금한 것은 많았다. 과연 그 질문들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누구에게 어떤 질문이든(심각한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해야 하는 신문기자로서는 부끄러운 고민이었다. 독자들께 양해를 구하는 척 고백하자면, 나는 궁금한 모든 것을 묻고 그것을 전부 기사로 쓰기에는, 조용필과 너무 가까웠다.

조용필을 지난달 4일 서울 역삼동 어느 한식집에서 만났다. 금요일 오후 강남은 자동차 지옥이었다. 근처 자신의 회사에서 출발한 조용필이 먼저 와 있었다.

가왕(歌王)은 숯불에 등심을 굽고 있었다. 조용필의 그런 일상을 보는 것은 낯선 느낌을 준다. 세 시간짜리 공연을 모조리 히트곡으로 채울 수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국내 최초로 음반 판매량 1천만 장을 넘긴 사람, 올림픽 주경기장을 채운 4만5천여 관객을 폭우 속에서 꼼짝 못하도록 감동시킨 주인공이 평범한 밥상 앞에 앉아서 자리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1971년 5월 ‘선데이서울컵 쟁탈 전국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자신 최초의 ‘가수왕상’을 받고, 이듬해엔 우주복을 입고 기타를 멘 사진을 실은 음반 ‘여학생을 위한 고운 노래 모음집’으로 인기를 끌었던 ‘오빠’ 조용필은 이제 환갑을 이태 앞두고 있다. 인터뷰는 이후 지난달 7일 서울 방배동 조용필 자택과 11일 서초동 조용필의 연습실에서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 이번 인터뷰에서는 그동안 묻지 못한 걸 주로 묻게 될 겁니다.

“무슨 소리야? 그런 게 뭐가 있어.” 그는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식으로 웃으며 반응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데뷔 40주년과 관련해서는 국내 신문과 방송을 포함한 모든 매체 가운데 가장 먼저 이뤄진 인터뷰였다.

- 40주년 인터뷰니까 그동안 못 듣고 못 쓴 얘기를 좀 해주시죠.

“물어보세요, 뭐든지. 허허허.” 뭔가 긴장을 만들어보려는 수작을 그는 허허실실 넘겼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적당히 대응하겠다는 뜻이었다.

- 나이트클럽에서 엄청난 개런티를 주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면서요.

“아, 그거? 30회 출연에 25억원 주겠다고 했지. 1990년대 초쯤인가. 그때 ‘안 한다’고 바로 거절하고 나서 한 이틀 갈등을 했던 게 사실이에요. 액수가 워낙 크니까. 그렇지만 밤무대는 물론이고 방송도 일절 않겠다고 선언을 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어. 공연만 하겠다고 결심하고 밤무대에 선다는 건 나를 배신하는 거지.” 그는 대답하고 나서 “그런 것은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런 제의가 왔었다는 사실을 꺼내는 것 자체가 싫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1990년대 이후 조용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이 부분은 기사로 써야겠다고 그를 설득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한 회 출연에 서너 곡 부르고 내려오는 나이트클럽 무대는 당시 많은 가수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1990년대 초 개런티로 25억원이면 요즘 시세로 50억원을 훨씬 넘을 것이라는 게 음악계 사람들의 말이다.

그 당시 조용필은 전국 체육관 공연을 시작했고, 생각보다 관객이 적어 고민이 많을 때였다. 그는 “어떤 도시에 가면 관객이 절반밖에 차지 않았다”며 “히트곡도 많고 인기도 있는데 왜 객석이 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이 안 왔다”고 말했다. 그런 불면(不眠)을 뚫고 거액의 밤무대 스카우트 제의가 왔는데, 그는 냅다 차버렸다. 최고가 되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이다. 이 밖에도 조용필은 여러 가지 제안을 뿌리쳐 왔다. 그중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을 제시한 공연도 있었다.

1993년 조용필은 “더 이상 방송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음반과 공연에만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를 40년 중 가장 큰 위기였다고 회고했다.

“생각보다 공연장에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으니까 위기감이 들더라고. 솔직히 말해서 방송으로 돌아갈 거냐, 무대를 계속 지킬 거냐 갈등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TV로 돌아가지 않았지. 어차피 밀리는 거잖아. TV에는 후배들이 계속 나오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밀릴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내가 음악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어. 그게 바로 무대였던 거야.” 조용필은 “그 밖에도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모두 이겨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한국의 라이브 콘서트 역사를 개척하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예술가들이 대개 그렇듯, 조용필은 자신을 최고의 음악인으로 여긴다. 스스로 그렇게 말한 적은 없으나, 음악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그 자부심은 천재적인 자신의 음악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용필은 악보를 한번 보면 노래를 부르고, 어떤 노래든 한번 들으면 바로 악보를 그린다. 공연기획사 서울기획 이태현 사장의 증언이다. “일본에 처음 진출했을 때였어요. 그때 외국 가수가 NHK에 출연하려면 일본 노래 한 곡을 부르는 게 관례였지요.

PD가 일본 노래 악보와 카세트테이프를 가져왔는데, 조용필 씨가 노래를 딱 한번 듣더니 ‘이건 필요 없다’며 테이프를 돌려주는 거예요. 그때 일본인 PD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저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하는 놀람과, 과연 한번 듣고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뒤섞인 얼굴이었죠. 물론 그 노래는 기막히게 잘 불렀습니다.”

- 초견(初見)에 악보를 읽지 못하고, 초청(初聽)에 악보를 쓰지 못하면 뮤지션으로 인정하지 않으시죠?

“그런 건 아니야. 세계적으로 훌륭한 뮤지션 중엔 악보를 전혀 읽지 못한 사람도 많았어요. 그렇지만 그들이 악보를 읽거나 쓸 수 있었다면 더 훌륭한 음악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

경동고 3학년 학생이었던 1968년, 조용필은 ‘벤처스’와 ‘비틀스’에 빠져 살았다. 결국 음악을 하겠다며 가출해 미군 클럽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화성학(和聲學)을 독학했다. 종이를 기다랗게 이어 붙여 건반을 그려 넣은 ‘종이 피아노’로 음계와 화성을 깨우쳤다는 것이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워낙 강하다 보니 조용필 주변에서 ‘금기’로 꼽는 질문이 있다.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에 대한 것이다. 혹자는 신중현과 비교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러나 의외의 대답을 했다.

- 신중현 씨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말 훌륭한 음악이지. ‘노란 샤쓰 사나이’가 나왔을 때, 이게 컨트리인지 뭔지 잘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불리고 있잖아. 신중현 씨가 작곡한 김추자와 펄시스터즈 노래들은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 그 당시에 누가 그런 음악을 하려고 했겠어.”

- 왜 신중현 씨 관련 질문을 싫어한다는 말이 나오나요?

“싫어한 적 없어요. 다만 나와는 음악 색깔과 정서가 달라. 물론 근본적으로는 같지. 추상적인 감정을, 사랑과 기쁨, 슬픔을 음악으로 만들어내고 뿌리가 록 음악에 있다는 것이 같아요.”

그의 40주년 기념 공연은 5월 24일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다. 그 다음 주말 대전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가 시작된다. 화제는 자연스레 지난 2003년 폭우 속에서 벌어진 35주년 공연으로 이어졌다.

“이건 정말 처음 하는 얘기야. 공연 마지막에 트랙을 한 바퀴 돌았잖아.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승리했다. 내 인생에서 승리했다.’ 그 감동은 아무도 몰라. 내가 음악을 한 이래 최고의 날이었어요. 평양 공연도 아니고 그날이 최고였어.”

조용필은 35주년 공연 성공을 ‘와이프가 남겨준 선물’이라고 했다. 그해 1월 아내와 사별하면서 유난히 매스컴에 많이 등장해, 결과적으로 공연 홍보가 됐다는 것이다.
이왕에 ‘금기’를 깨고 질문한 김에 한 가지를 더 물었다. 바로 그의 첫 결혼에 대한 질문이었다. 조용필은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1984년 3월 박지숙 씨와 느닷없이 결혼을 했으나, 3년 뒤 이혼했다.

-박지숙 씨와의 결혼의 실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죠?

“그건… 나중에 내 회고록에 써야 할 내용이야.”

- 결혼식에 하객도 없고 기자만 잔뜩 있었잖아요. 뭔가 사연이 많은 것 같은데요.

“나는 그게 결혼식인 줄도 모르고 갔었어.”

- 그럼 ‘이런 결혼식은 안 한다’고 했어야 할 것 같은데….

조용필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그때는 매스컴이 너무나 무서웠어.”

당시 조용필의 나이 서른 넷. 연말 방송사 가수왕을 모조리 휩쓸고 6집 ‘눈물의 파티’를 새로 내놨을 때다. 그 인기 주변엔 어김없이 연예 주간지들이 있었다. 스캔들로 먹고사는 매체들이었다. 조용필은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며 손을 내저었다. 첫 결혼에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과거 여러 차례 “조용필의 첫 결혼은 연예 주간지 기자들이 억지로 시킨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하고 생각했었다. 매스컴이 너무 무서웠다는 조용필의 말에 수많은 이야기가 녹아 있는 느낌이었다.


갑작스런 결혼과 그의 일본 진출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 그는 이혼 후에 한동안 혼자 살다가 소개로 만난 재미교포 안진현 씨와 1994년 3월 다시 결혼했다. 미국에서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던 안씨와 한국에서 활동하던 조용필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2003년 1월, 조용필은 다시 한번 아내와 이별해야 했다. 심장병을 앓던 안씨가 갑자기 숨진 것이다. 안씨는 조용필의 선산이 있는 경기도 화성에 묻혀 있다.

- 요즘도 꿈에서 부인을 보시나요?

“요즘엔 안 나타나요. 마누라 가고 나서 한 2년 반쯤은 꿈에 자주 나타났어. 이제 안심이 되나 봐.”

- 선산엔 자주 가십니까?

"요새는 좀 뜸해. 한달에 한두 번쯤 가요. 예전엔 일주일에 한번씩 갔지. 주변에서 너무 자주 가지 말라고 해서….” 실제 안씨와 사별한 뒤 조용필은 매주 한번씩 꼬박꼬박 아내가 묻힌 곳에 다녀왔다. 묘비 앞에 놓인 국화가 시들기 전에 새 국화 다발이 놓였다.

2년 전쯤 “조용필이 한 방송인과 사귄다더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조용필은 그 당시 “내가 결혼한다는데?”하며 웃고 말았다. 그는 “한번 본 적이라도 있는 사람과 그런 소문이 나면 모르겠지만, 정말 황당하다”고 말했었다.

- 다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식으로 받아들이던데요.

“나도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애인하고 밥도 같이 먹으러 다니고 그러고 싶어. 중매 선다는 사람도 있었고.”

- 그럼 결혼할 생각이 있긴 하세요?

"아니지. (하늘에 있는) 마누라한테 혼나. 이제 혼자 사는 게 편하고.” 조용필은 안씨가 저 세상으로 간 후 “앞으로 심장재단을 만들고 죽을 때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했다.

조용필의 5월 공연은 작년 12월 28, 29일 올림픽 체조경기장 공연 이후 5개월 만이다. 당시 공연을 마친 조용필은 지인 몇 명과 집 부근에서 뒤풀이를 했다. 피로에 알코올이 겹쳐 녹초가 된 그를 부축하고 집 앞에 당도한 시각이 새벽 2시 40분이었다. 골목에 어둑하게 서 있던 승용차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여자 다섯 명이 뛰어나왔다. 팬들이었다. 이들은 “오빠, 왜 이렇게 술 많이 드셨어요? 건강하셔야 돼요”하며 울먹였다.

조용필 팬은 없는 데가 없다. 집 전화번호를 바꾸면 전화국에 있는 팬이 번호를 알아내고, 비행기를 타려면 항공사에 있는 팬 때문에 공항에 꽃다발을 든 팬들이 나타난다. 한번은 역삼동에 있는 조용필의 회사(YPC)에서 그를 만나고 오후 10시쯤 나왔는데, 30대 여성 팬 두 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오빠!” 하면서 다가왔다. 조용필의 자동차가 밖에 서 있는 것을 알고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오빠’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차종과 차량번호를 알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조용필 팬은 끊임없이 자기증식을 하고 있다. 지난 2004년엔 중3과 고1 학생들로 이뤄진 ‘광클(광적인 팬클럽)’이 생겼다. 이 ‘어린 팬들’ 덕에 조용필은 오랜만에 종이학 수천 마리를 선물로 받았다.

- 잊을 수 없는 팬 이야기 좀 해주시죠.

“1980년대 초 부산 공연을 갔을 때야. 공연 끝나고 호텔에 가서 씻으려고 속옷만 입고 욕실 문을 열었는데, 그 안에서 여자애들이 와장창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한 열 명은 되겠더라고.”

- 어떻게 거기 있을 수 있죠?
“몰라, 그건 나도. 하여튼 내 방에 들어와서 숨어 있다가 내가 나타나니까 겁이 나서 그랬겠지.”



그는 팬들이 밤늦도록 집 앞에서 기다릴 때는 고맙기도 하지만 걱정도 된다고 했다. 다들 가정이 있는 사람들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조용필은 “팬들에게 항상 감사하지. 팬이 멀어지면 나는 끝이야”라고 했다.

늘 팬들에 둘러싸여 있을 것 같지만 조용필이 매일 돌아가는 곳은 방배동의 방 다섯 개짜리 빌라다. 그 중 방 하나에는 운동기구가 가득하다. 그는 매일 아침 이곳에서 빨리 걷기 운동으로 땀을 빼며 하루를 시작한다. 조용필의 스태프를 제외하면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출퇴근하며 가사를 돌봐주는 아주머니가 유일하다. 국가대표 축구팀 허정무 감독이 바로 위층에 사는 이웃이다.

거실에는 대형 TV가 있으나 그는 화면 없이 음악만 틀어주는 위성방송 음악채널을 듣거나, 동물 다큐멘터리를 본다. 그는 복잡하고 시끄러워서 드라마나 쇼는 보지 않는다고 했다. 차 안에서는 미군방송(AFN)이나 KBS 1FM을 늘 켜놓는다. 그의 유일한 낙은 골프다. 싱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술은 예전보다 많이 줄였고, 담배는 완전히 끊었다.

- 담배 끊은 지 꽤 된 것 같은데요.

“2005년 3월에 끊었으니까, 이제 3년이 넘었네. 손에 한번 쥐지도 않았어요. 예전엔 녹음할 때면 하루 세 갑씩 피웠지. 노래 녹음할 때 말고 반주 녹음할 때.” 조용필은 체중이 너무 줄어서 담배를 끊었다. 체중이 50kg 미만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담배를 끊으니 식욕이 생기고 몸무게가 늘더라고 했다.

조용필은 ‘앳킨스’라는 밴드로 데뷔해 ‘파이브 핑거스’, ‘김 트리오’, ‘25시’, ‘조용필과 그림자’를 거쳐 오늘의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꾸렸다. 일본 활동 때 일본인 밴드 이름은 ‘조용필과 괜찮아요’였다. 18집의 정규앨범을 냈고, 1994년에 이미 음반 총 판매량이 1천만 장을 돌파했다.

“밴드 이름을 ‘그림자’로 했다가 이미지가 너무 어둡지 않나 싶어 ‘위대한 탄생’이란 이름으로 내가 지었어요. 주변에서 별로인 것 같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 같아도 유명해지면 진짜 좋은 이름이라고 주장했어. 무지하게 건방질 때였지. 하하.”

그는 ‘건방지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혹독하게 자신을 단련해 성취한 자부심의 겸손한 표현이다. 작사가 양인자 씨는 조용필 데뷔 초기인 1970년대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방송국 대기실에서 조용필 씨를 봤는데, 밴드 멤버 한 명이 늦게 왔어요. 그때 용필 씨가 그 사람에게 달려가 사정없이 발로 걷어차면서 소리쳤지요. 정신 차려!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이야!

- 처음 가출할 때 40년이나 음악을 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절대로 생각 못했지. 우리는 비틀스 세대니까, 그냥 하고 싶은 건 해야 했을 뿐이지. 모든 게 관객의 힘이에요. 무대라는 게 관객과 음악을 공유하면서 즐거워하는 거잖아. 관객이 기뻐하면 그렇게 좋고 힘이 날 수가 없어.”

- 40년을 맞는 감회가 있을 텐데요.

“나는 현재진행형이에요. 한창 음악하고 있는 사람한테 왜 자꾸 40년을 물어봐. 40은 숫자일 뿐이지.” 관객 4만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번 공연 티켓은 이미 매진을 향해 치닫고 있다.

- 작년 말 공연을 보니까 평소보다 좀 힘들어 하는 것 같던데요.

“예전보다 오히려 힘이 덜 드는데? 예전에는 밴드보다 내 목소리를 많이 튀게 음향을 설정했는데, 요즘은 반주 음악에 살짝 걸쳐 들리게 음향을 조정하거든. 그래서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지.” 그는 소주잔을 쥐며 “이제 술 마시면 다음날 힘들어서 잘 안 마시게 된다. 외국 나가면 한 잔도 입에 안 댄다”고 했다. 그러나 음악에 관한 한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조용필을 처음 만난 건 2002년 10월이었다. 당시 예술의 전당 연말 공연을 앞둔 인터뷰 자리였다. 그날 오후 7시 30분 한 일식집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새벽 3시 그의 집에서 끝났다. 빈 맥주 캔이 40개쯤 됐다. 그 7시간 30분 동안 조용필은 오로지 음악 이야기만 했다. 수많은 뮤지션들과 오랜 대화를 해봤지만, 줄기차게 오직 음악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조용필밖에 없었다. 고백하건대, 그날 조용필이 ‘취재원 이상의 존재’가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도 음악을 좋아하는 기자를 좋게 본 모양이었다. 첫 만남 이후 수시로 “어디 있느냐”는 전화가 왔다. 한잔 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작 만나보면 술을 마시려고 부른 게 아니었다. 최근 유럽과 미국의 음악 동향, 눈여겨볼 만한 외국 밴드, 공연에 응용할 수 있는 외국 뮤지션의 무대장치, 뉴욕 브로드웨이에 새로 올라온 뮤지컬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곤 했다.

그 역시 대중음악 담당기자로부터 이런저런 정보를 듣고 싶었던 것 같았다. 물론 늘 배우는 것은 이쪽이었다. 처음엔 “조용필이 부르는데 가봐야지”라고 했던 아내는 그 주기가 짧아지자 “조용필은 친구 없어?”라고 물었다. 너무 자주 불러내는 것 아니냐는 푸념이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음악인들은 수십 년을 그와 알고 지냈으나 여전히 그를 어렵게 생각한다. 그의 불 같은 성격을 알기 때문이다. 조용필이 오십 줄에 들어선 후배 음악인에게 “네가 음악에 대해서 뭘 알아?”라고 호통을 치는 걸 본 적도 있다. 그런데도 혼쭐난 후배들은 며칠 뒤면 실실 웃으며 조용필 앞에 나타난다. 그 카리스마를 감당할 수 없을뿐더러 조용필과 함께 작업하면 자신들의 음악도 완벽해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국민가수, 가왕, 라이브의 제왕…. 그를 부르는 칭호는 많지만, 미당(未堂) 서정주가 칭한 ‘당대 최고의 명창’이 가장 소박하고 명쾌하다. 30년을 한 세대로 치면, 그는 이미 당대(當代)를 10년이나 넘겨 여전히 최고의 자리에 서 있다. 그는 어떤 이름보다 ‘조용필’로 부를 때 가장 정확하게 묘사된다. 조용필은 오늘도 서초동 연습실에서 홀로 공연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역시 ‘조용필’로 오랫동안 남고 싶기 때문이다. 공연문의 1544-1555

/ 여성조선
  글 한현우(조선일보 엔터테인먼트부 기자) ㅣ 사진 허영한·신승희

출처:http://danme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5/22/2008052200940_2.html
번호 제목 신문사 기사 날짜 조회 수
1473 [경향신문 2008-05-29] 부산을 담은 미술 ‘돌아왔다, 부산항에’     5203
1472 [충청 투데이 2008-05-29] 환상적 영상·음향 관객압도 작은거인 '지상 최대의 쇼'     4820
1471 [스타뉴스 2008-05-29] 공연으로 말하는 '베테랑 가수' vs 예능에 나서는 '요즘 가수'     5081
1470 [스포츠조선 2008-05-29] 이승철-조용필, 원조오빠들의 '파워 카리스마'     5245
1469 【フォト】チョー・ヨンピル&朴智星が対面     5102
1468 [芸能]チョー・ヨンピル40周年公演に5万人が熱狂     5146
1467 [세계일보 2008-05-27] [세계타워]‘늙은 오빠부대’를 위하여     4928
1466 [브레이크뉴스 2008-05-27] 조용필 대전공연 서울관객 몰린다     5222
1465 [문화일보 2008-05-27] 조용필과 미군 방송     5236
1464 [브레이크뉴스 2008-05-27] 조용필 대전공연 서울관객 몰린다     5279
1463 [동아일보 2008-05-27] ‘한 많은~韓문화 한 호흡’ 조용필의 음악세계     5278
1462 [한겨레 2008-05-26] “조용필의 노래는 나의 과거이자 오늘”     5217
1461 [중앙일보 2008-05-26] [철환의 즐거운 천자문] 사운드·스케일·스토리…조용필 공연 빛낸 3S     5248
1460 [데일리안 2008-05-26] 가수 권혜경 별세…조용필 ‘최고의 헌사’     5440
1459 [문화일보 2008-05-26] 歌王 40년… 5만명의 감동 합창     5265
1458 [마이데일리 2008-05-26] 조용필-서태지가 함께 추천한 유일한 명반은?     5205
1457 [매일경제 2008-05-25] [포토] 조용필 40주년 콘서트, 원조 오빠부대 '열광'     4891
» [뉴스플러스 2008-05-25] 조용필 나의 노래 40년 스페셜 인터뷰     5124
1455 [스포츠한국 2008-05-25] 조용필·이승철·이승환 '중년스타의 힘!'     5344
1454 [데일리팜 2008-05-25] "조용필 노래 들으며 약국업무 시작"     5299

공식 미지 트위터

뉴스 - News

조폐공사, 조용필 50주년 메달 수익 음악 영재 발굴에 기부

조폐공사, 조용필 50주년 메달 수익 음악 영재 발굴에 기부 조폐공사, 조용필 50주년 기념 메달 수익금 '음악역 1939' 전달식 (왼쪽부터 조폐공사 류진열 사업 이사, 김성기 가평군수, 음악역 1939 송홍섭 대표) [음악역 1939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한국조폐공사가 제작한 '가왕' 조용필 50주년 기념 메달 판...

뉴스 - News

조폐공사, 조용필 메달 수익금 일부 음악영재 '후원'

조폐공사, 조용필 메달 수익금 일부 음악영재 '후원' 한국조폐공사(사장 조용만)가 '조용필 데뷔 50주년 기념메달' 판매 수익금 중 일부를 음악영재 지원 사업에 후원한다.   공사는 11일 경기도 가평 뮤질빌리지 '음악역 1939'에서 조용필 데뷔 50주년 기념메달 판매 수익금 가운데 2500만원을 가평군과 함께 가평뮤직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