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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 “밥그릇 싸움이었다면 부끄러워서 내가 못해요”

"집시법 위반 출두 요구서 두 차례 받아
우리나라처럼 배우가 끈질기게 시위하는 곳 없어

정부 잘못…양보나 타협 없어 투쟁은 계속된다
정일성 감독. 속 알 수 없다고 ‘독일 잠수함’ 별명"

‘미스터 퍼펙트(Mr. Perfect).’
이달 초 ‘국민 배우’ 안성기를 만난 다음에 머리에 떠오른 단 한 단어다.
가늘든 굵든 굴곡이라도 한 줄 있는 게 인생 아니던가?
그런데 그의 인생은 완만한 상승 곡선과 같았다.
그의 매니저를 따로 붙잡고 어떤 인간이냐고 물었더니 “평안하고 가정적이고 …” 이딴 소리만 한다.

매니저에게 더 생각해 보라는 숙제를 던지고 며칠 뒤 전화했더니 대뜸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평소에 화를 안 내는 안성기는 유독 사이렌이 울릴 때 개의치 않고
제 갈 길 가는 차들을 보며
“왜 요즘 사람들은 그런지 모르겠다”며 못마땅해 한다는 것이다.
매번 그랬단다. 그가 얼마나 양보의 정신을 중시하는가를 알려 주는 대목이다.

그런 그가 고집쟁이가 됐다.
스크린쿼터라면 양보고 타협이건 없다.
문화 침략 저지 및 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한 영화인대책위 공동 위원장으로서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문화제가 집시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종로경찰서로부터 출두 요구서를
두 차례(가장 최근이 12일)나 받았으나 모두 불응했다.
싸움이 이제 시작됐단다.

최근 개봉한 영화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적 대통령 역을 비롯해
올해 안에 <라디오 스타>. 한·중·일 합작 영화 <묵공> 등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줄 국민배우.
“스크린 쿼터 축소.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다이내믹한 몸부림을 인간 안성기 탐구의 출발점으로 잡았다.

■밥그릇 싸움이었다면 벌써 끝났을 것

스크린 쿼터 시위의 대표자처럼 인식되어 있지만 그는 이런 행사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
지금도 영화 현장에 있을 때가 가장 즐거울 뿐이다.
그의 성격을 알려 주는 예 하나. 며칠 후에 만난다고 약속하는 것조차 싫어한다.
그래서 누가 며칠 후 만나자고 하면 그가 먼저 “지금 시간 됩니까”라고 묻는다.
“공직에 대한 제안을 받는다면”이라는 질문을 하니
“나더러 그런 것 하라면 하루도 못 견딜 것”이라고 손을 내젓는다.

“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그런 자리(영화인대책위 공동 위원장)에 있으니 하는 거다.
우리 영화가 있는 한 내가 하고. 후배가 할 거다.
우리 나라처럼 영화배우들이 나서 끈질기게 하는 곳은 없을 거다.”

그는 그동안의 과정을 안타까워했다.
“스크린 쿼터 싸움을 집단 이기주의와 외제차로 몰고 간 게 안타깝다.
우리가 넘어지면 연관 분야로도 FTA(자유무역협정)가 들어올 것이다.
더 힘내라고 해야 맞는 건데 왜 국민들이 없애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영화가 잘되기 시작한 건 몇 년 전부터다.
앞으로도 잘못한다면 비난의 대상이지만 지금은 많이 성원을 해야 할 시기다.”

정부의 정책도 강하게 비판했다.
“정부의 잘못이다.
아무리 따져 봐도 좋은 점이 하나도 없는데 왜 FTA를 받아들이려 하는지 알 수 없다.
FTA 이끄는 사람들만을 위한 정책인 것 같다.
그렇게 앞뒤 없이 무작정 가는 게 화가 난다.”

그는 양심에 걸고 정당함을 주장했다.
“우리 밥그릇 싸움이었으면 벌써 끝났을 거다.
부끄러워서 어떻게 지속하겠는가.
이런 동력이 나오지 않는다.
이번에 스크린 쿼터 싸움을 하면서 힘든 것은 1인 시위할 때 배우가 안 나오면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사진1. 네 살(사진 오른쪽) 무렵 형님과 함께.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이 척 봐도 개구쟁잇과다. 어릴 적 굉장히 활발했으나 다섯 살에 영화 데뷔한 후로 자주 남을 의식하면서 조용한 성격으로 변했다. 고등학교 때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는 타인으로부터 자꾸 숨으려고 했다.

사진2. 영화 <십대의 반항>(1960년)에서 전쟁 고아로 열연하고 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이 영화 전에 몇 작품을 하며 연기 경험을 쌓았고. 이 영화를 통해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특별상(아역상)을 수상했다. 남대문 근처에서 앵벌이하고 있는 꼬마 역을 하는 안성기에게 돈을 주고 있는 사람은 여배우 주증녀.

사진3. 이달 3일 광화문 열린광장서 가진 스크린 쿼터 반대 시위 현장에서 안성기가 나서기 싫어하는 체질에도 불구하고 영화인 처지를 시민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사진4. 한국외국어대학 베트남어과 재학 시절 ROTC 군복을 입었다. 군기가 바짝 든 얼굴이다. 전방에 관측 장교로 갔다. 1970년대 말 ROTC는 취업이 잘된다는 점 때문에 선택했는데 베트남 전쟁의 영향으로 취업에 보탬이 되진 않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상황이 안성기를 영화배우로 인도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의 배우 한 명 만들기 위해 베트남 망해?

제대로 영화배우가 되기 전까지 그의 인생은 ‘영화’와 ‘베트남’의 줄다리기 사이에 놓여 있었다.
영화배우 데뷔는 불과 다섯 살.
만능 체육인이던 아버지가 유현목·김기영 감독 등과의 인연으로 영화 제작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1957년 김지미의 데뷔작이기도 한 <황혼열차>에서 전쟁 고아로 출연하게 됐다.

“그땐 아역 배우라는 게 없었다.
전쟁 고아 역이면 진짜 고아를 데려다 시켰다.
잘못하고 하니 감독이 친구 아들을 데려다 찍은 것 뿐이다.
<모정>이란 영화에선 꽤 중요한 역을 맡았고. 잘한다는 평판이 나 중학교 때까지 계속 영화를 찍었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니고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영화와 거리가 멀어졌다.
마땅한 배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대학·군대 시절까진 지극히 평범했다.
아버지는 영화 제작에서 성공을 못하고 영화사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했다.
어머니는 주부로 가정에 충실했다.
“아버지가 술을 못해 일찍 퇴근하셨다.
잘 정돈된 가정의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가족끼리 충분히 이야기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알아서 하고 눈치 채 주기 바라는 가족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 때문에 고전하기는 했지만 문예반에서 교지를 만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결국 수학이 부족해 대학에서 원하는 과(프랑스어과)에 들어가지 못했다.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를 선택했다.
‘내가 원래 잘하는 놈인데’라는 의식이 가슴속에 내내 남았다.
공부에 설움이 맺힌 나머지 노력한 끝에 결국 대학에서 과 톱으로 졸업했다.
또 한편 연극 서클에서 대학 생활의 재미를 찾았다.

그는 졸업 후 베트남에서 인생을 설계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70년대에는 ROTC라면 대기업에서 무조건 뽑았기 때문에 거기에 지원했다.
그런데 4학년 때(74년)부터 베트남에 파병을 안하고 철군을 하는 게 아닌가.
할 수 없이 전방에 관측 장교로 가면서 상황을 봤는데 소위 말기에 덜컥 공산화가 됐다.
베트남이 그렇게 되니 ROTC 중에서도 나만 대기업에 취업이 안됐다.
그래서 ‘취직은 안한다’는 오기가 생겼다.”

결국 76년부터 2년 동안 실업자 생활을 하며 혼자서 영화 수업을 쌓았고.
80년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뜨면서 영화배우로서 길이 확 열렸다.
“취직됐으면 지금 베트남에서 사업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그림 그리기도 좋아했는데 어쩌면 베트남에서 그림 그렸을 수도 있다.
지금도 이런 농담 한다.
‘한국의 배우 한 명 만들기 위해 베트남도 망해야 했다고.’”

■나는야 독일 잠수함!

그는 인생에서 이렇다 할 굴곡을 겪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가.
“스무 살 때 겪을 걸 나는 다섯 살에 겪어 버렸다.
완전히 노인네 속이었다.
그래서 정일성 감독은 속을 알 수 없다는 뜻으로 나를 ‘독일 잠수함’이라고 부르곤 했다.
나는 사물의 이면을 보았고.
그 답을 너무 일찍 알았다.
어른들을 볼 때 일을 열심히 한 사람들이 끝이 좋았다.
스캔들이 있고 한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중간에 낙오되고 끝이 안 좋았다.”

성격적 부분도 있다.
“이미 정답을 알고 성격적으로 차분하니 인생에서 시행착오가 없었다.
내 삶은 평범하고 백지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진한 맛은 영화 속 인물을 통해 보면 됐다.
영화에서 겪으니 내 삶이 회오리 칠 필요가 없다.
남의 눈에 비춰지는 걸 의식한 나머지 나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못 살았다.
결과적으로는 그러길 잘했다.
‘영화배우도 괜찮은 사람들이네’라는 인식을 심어 준 것 같다.”

그는 집에 있을 땐 조용히 시간을 보낸다. 격일제로 이틀에 한 번씩 운동하러 다니고
책이나 TV 보는 삶이다.
책 보는 걸 좋아하는데 노안이 와서 책 보고 쉽게 피로해진다.
“신경질 나고 안타깝다.”

‘미스터 퍼펙트’란 이미지를 주지만 그 역시 완벽하진 않았다.
“큰 놈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다빈이다. 아빠가 영화하는 걸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큰 놈은 그림 무척 잘 그려요. 학교에서도 유명하다오.”

<팁1>베드신? 여배우에게 진한 눈빛 못 보내 엉망

영화 경력이 거의 50년이나 되어 가지만 안성기의 베드신은 찾아보기가 어2렵다.
그는 쭈뼛쭈뼛하며 그 사연을 설명했다.
일단 베드신은 찍지를 않았다.
“베드신도 굉장히 좋은 연기지만 내가 그 연기를 잘못한다.”

주변을 의식한 탓도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기 때문에 존경은 못 받을지언정
이상한 건 하지 말아야겠다는 식의 절제를 했다.
“80년대에는 사랑 이야기보단 사회적 이슈가 되는 영화를 많이 선택했다.”
멜로 연기는 생각만 해도 어색하다.
“멜로 영화를 못한 건 나의 한계다.
동시에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여배우에게 진한 눈빛 보내는 건 도저히 못하겠다.
해 보려 하면 웃음이 난다.”

<팁2>조용필과는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한 장의 흑백 사진이 강하게 눈길을 끈다.
중학교 2학년 때 강화도로 소풍 간 이 사진에선 재미난 얼굴이 또 하나 등장한다.
한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가수 조용필(사진 위쪽 오른쪽에서 두 번째)로 안성기(아래쪽 맨 오른쪽)와 같은 반 친구였던 것.

안성기는 “누구도 용필이가 노래를 부르리라곤 상상을 못했다.
조용한 성격이었고.
그냥 공부만 잘하는 학생으로 되어 있었다.
아무도 몰랐다.
중학교 때는 자주 만났고.
고등학교 때도 가끔 볼 정도로 친했다.
대학 때 그가 무대에 서기 시작하면서 노래 부르는 걸 알았다.
나중에 서로 잘되고 만나 기뻐했다”라고 밝혔다.

안성기의 후배 박중훈은 이 사진을 볼 때마다
“한 사람은 영화 쪽으로. 또 한 사람은 노래 쪽으로 갔는지 너무 신기하다”라고 말한다.

<팁3>안성기는 누구?
생년월일: 1952년 1월 1일. 서울
체격: 176㎝. 72㎏
혈액형: B형(군대에서 AB형 판정을 받아 인식표에까지 AB형을 새겨 놓았으나 7년 전 종합 검진에서 B형임을 처음으로 알게 됨)
가족: 부인 오소영씨와 두 아들 다빈(고 3). 필립(중 2)
학력: 서울 돈암초-경동중-동성고-한국 외국어대 베트남어과
취미: 잡기와 운동
데뷔: 영화 <황혼열차>(57년)
출연작: <바람 불어 좋은 날>(80년). <만다라>(81년). <고래사냥>(84년). <깊고 푸른 밤>(85년). <하얀 전쟁>(92년). <투갑스>(93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99년) 등 다수


장상용 기자
이호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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